[일본 '우향우'] 한.일 전문가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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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과 일본의 두 학자가 일본 우경화의 위험한 뿌리에 대해 논의했다.

방한 중인 도쿄 (東京) 대 교육학과 사토 마나부 (佐藤學.48) 교수는 진보적 역사 교육을 주장해왔다.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林志弦.40) 교수는 최근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라는 저서를 출간, 배타적 민족주의론에 대한 경계와 반성을 제기했다.

▶임지현 = 사토 교수의 흥미로운 글 '개인 신체 기억으로부터의 출발' 을 보면서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10세 때인 42년 에코는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주제의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사토 마나부 = 어린 소년에게도 신체의 기억은 남는 법입니다. 그것이 곧 역사를 바라보는 출발점입니다. 어린 에코에게 남겨진 파시즘의 기억은 마침내 에코가 후에 파시즘을 극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요.

▶林 =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우익 민족주의 경향은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이 가능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와 역사 왜곡을 주도하는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위한 모임' 과 같은 집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사토 = 일본의 우익화 현상은 미군의 일본 점령과 함께 진행된 일본의 현대화 과정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전통 우익세력과 반미를 내세우는 신국가주의 그룹이 주도한 현대화 과정의 바탕은 반미였습니다.

이들은 안보와 반공을 표면에 내세웠지만 사실상 반미 극우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후에 전쟁의 책임을 단지 군부에만 묻는 등 전쟁의 기억을 소거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林 = 일본은 특히 좌우를 막론하고 국익을 가장 앞세우는 국가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지 않나 합니다.

예를 들면 좌익 계열의 '역사교육자협의회' 설립 취지문조차 첫 문장이 '우리는 끝없이 조국을 사랑한다' 라고 돼있지요.

▶사토 =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전후 일본 공산당이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민족주의의 강화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인 아시아 식민지 침략에 대한 죄상을 제대로 반성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일본의 침략을 '진출' 로 서술한 82년 교과서 왜곡이 그 상징적 사건이 될 겁니다.

▶林 = 당신은 국민이나 민족 일반으로 추상화된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해체함으로써 민족사의 신화를 깨뜨리는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역사는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집단의 기억입니다. 개인으로 해체된 역사는 다시 공통된 집단의 역사로 재구축돼야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토 = 종군 위안부 문제에서처럼 개인적인 신체의 기억이 나타나면 국가주의 역사는 허구며 대상조차 불투명한 독백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납니다.

개인의 역사를 철저히 부정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20만명의 전쟁 사망자조차 없었다고 부정합니다.

국가라는 집단의 역사에만 집착하는 그들은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이 역사라는 것이죠. 난징 (南京) 대학살을 부정하고 종군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식의 엄청난 발언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林 = 지난 97년 일본 사이타마 (埼玉) 현의 공립 고등학교 학생들이 졸업식에서 일장기 (히노마루) 게양과 일본국가 (기미가요) 제창을 요구하는 교장의 지시에 반발하고 집단 퇴장한 사건이 있었지요. 고교생들이 국익 우선의 의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권리장전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주목됐습니다.

▶사토 = 일본의 신세대 중 일부는 최근 할아버지의 참전 지역을 방문하는 활동 등을 통해 전쟁과 관련한 일본의 침략 사실을 충분히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곧 개인의 기억을 되살려 집단의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추상화된 역사가 아니라 개개인의 구체적인 역사를 바탕으로 집단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林 = 그러나 일본의 교과서 제작자들은 날이 갈수록 우익 민족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익 이데올로기는 한국과 일본이 연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가 혹은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중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통의 역사를 갖는 동아시아 공통의 역사 교과서 제작을 민간 연대를 통해 진행하는 것은 하나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입니다.

▶사토 = 국가적 사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 앞에서 이야기한 우익 민족주의 역사를 넘어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해야 하는 전쟁 책임의 사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교과서에는 아직 많은 문제가 빠져 있고, 정확하게 기술돼 있지도 않아요. 게다가 교과서의 문구 한두개를 첨가한다고 해 문제가 해결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사회 전반의 역사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언제 또다시 교과서를 바꿀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또 교과서가 바뀌었다 해도 학습지도 과정이 국가주의 역사관에 의해 지배된다면 교과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林 =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 배상도 잘 했고, 현재는 정기적으로 민간 차원에서 교과서 서술에 대한 모임을 갖고 내용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한.일간에도 민간 차원의 역사 교과서 서술 조율 쪽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토 = 민간 차원의 해결책을 찾는 것은 앞으로의 가장 큰 과제며 기대도 큽니다. 이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이 만나 토론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정리 = 고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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