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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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호 32면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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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각종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奔競)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代納權)이 있었다.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런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 이런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직후 종친·공신들의 분경을 금지시키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김질의 항의를 받고 본인만 극형(極刑)시키는 것으로 물러섰으나 이후에도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는 사헌부의 서리(胥吏)와 조례(<7681>隷: 관청 소속의 하인)들을 보내고, 무신들의 집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드나드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들은 예종보다 공신들이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반면 무인들은 우직하게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다. 예종 즉위년(1468) 10월 19일 공신들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무인인 선전관들이었다. 고령군 신숙주의 집에서는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보낸 김미를 체포하고,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보낸 주산(周山)을 체포했다. 귀성군 이준과 병조판서 박중선(朴仲善), 이조판서 성임(成任)의 집을 드나드는 인물들도 체포했다.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 분경하는 것도 선전관이 체포한 것을 지적하면서 “분경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의 책임”이라면서 사헌부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하옥했다. 사헌부가 공신들의 눈치를 봤다는 뜻이었다.

①김홍도의 밭갈이 백성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공신들의 대납권 때문에 몇 배의 세금을 더 내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②정인지의 詩句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사진가 권태균

신숙주는 ‘박서창이 글을 보내 위문하면서 표피(豹皮) 한 장을 보내기에 받지 않았으나 김미가 체포된 것’이라면서 예종에게 사과 겸 해명을 했다. 예종은 “경은 무엇을 혐의하는가? 다만 박서창의 과오이다”라고 달랬으나 신숙주는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예종은 이 사건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김미를 비롯한 분경자들을 친국(親鞫)했다. 김미는 박서창의 반인(伴人: 수행원)이었으며 주산은 지방 관청의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경저인(京邸人)으로서 기껏해야 이서(吏胥) 아니면 서인(庶人)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천인들에 불과했는데 국왕이 직접 친국한 것이다.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1년 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때 신숙주·한명회가 이시애와 연결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두 사람이 투옥되었던 적이 있었다. 예종은 함길도의 이런 특수성을 거론하며 김미를 꾸짖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權門)을 섬기느냐? 작년에 그 도(道: 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들이 의혹해 관찰사·절도사 및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9일)”

형식은 김미를 꾸짖는 것이지만 내용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꾸짖는 것이었다. 예종은 관찰사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그 자리를 한치형(韓致亨)으로 교체했다. 병조판서 박중선의 집에서 체포된 김산이 깨진 그릇을 고치는 칠장이(漆工)라는 사실을 알고 석방시켰으며, 이조판서 성임(成任) 집에서 잡힌 여종 소비(小非)는 수륙재(水陸齋: 불가의 제사)에 쓸 과실을 빌리러 갔다는 말을 듣고 석방시켰다. 예종이 이들을 직접 국문한 것은 사헌부나 의금부에서 공신들의 위세 때문에 부실 수사를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예종이 천인들을 친국했다는 사실에 공신들은 경악했다. 공신을 직접 벌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이 천인까지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경하기는 어려웠다.

예종은 공신들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배징(倍徵), 곧 두 배였고 보통이 서너 배였다. 개인의 세금을 대납하는 것이 아니라 『예종실록』에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군현 단위로 대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액수가 막대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대납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해로우니, 이제부터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를 물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 몰수한다. 공사(公私) 모두 대납을 금한다”라고 선언했다. 『예종실록』은 “대납(代納)하여 쌀로 바꾸는 것은 모두 거실(巨室)에서 하는 짓이었으므로, 능히 혁파할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세조가 공신과 종친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게 한 제도였다. 대납의 폐해는 막대했다.

“대납으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閭閻: 민간)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런 대납을 금지시켰으니 『예종실록』이 “임금이 즉위 초에 먼저 대납의 폐단을 제거하니, 선정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라고 평가한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예종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대납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10월 21일에는, “이제 대납을 금했는데도 수령이 전과 같이 수렴(收斂: 받아들임)한다면 더욱 가혹한 것으로서 능지(凌遲)함이 가하다”라고 선포했다. 수령이 전처럼 대납을 허용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납이 없어지지 않자 예종은 방을 붙여서 대납 금지의 뜻을 널리 알렸다.

“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입법의 본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다고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히 목을 베겠다.(『예종실록』즉위년 12월 9일)”

대납 금지에 대한 예종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공신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선납했으나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조에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예종 1년 1월 27일 ‘이미 대납하고도 값을 다 거두지 못한 자는 기한을 정해 거두도록 하자’고 요청했다. 예종은 윤2월 그믐까지 한시적으로 받으라고 허용했다. 『예종실록』은 “임금이 즉위 초에 특별히 대납을 없애게 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매우 기뻐했는데, 이때에 이런 명령이 있자 백성들의 바람이 조금 이지러졌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윤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대납을 매년 저절로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가업처럼 여기던 종친·공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재위 1년 4월에는, “금후로는 무릇 군무(軍務)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議親: 임금의 친척)을 물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재신·공신이라도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라고 명했다. 공신들의 면죄권에도 손을 댄 것이다. 양민을 천민으로 만든 자는 교형(絞刑: 교수형)이었다. 재위 1년 5월에도 예종은 “관찰사의 소임은 본래 1도(道)를 통찰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신·의친·당상관에 구애된다. 앞으로 민생에 해를 미치는 자는 공신·의친·당상관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직단(直斷)하여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예종 1년(1469) 11월 사헌부 조례들이 하동군 정인지의 집을 드나드는 자를 체포하려 하자 정인지의 가동(家<50EE>: 종)이 사헌부 조례의 옷고름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의 정인지 국문 요청에 대해 예종은 “공함(公緘: 서면질의)으로 탄핵하라”고 명령했다. 예종과 공신 세력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구공신의 견제 세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예종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