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패자뿐인 오심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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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준호 스포츠부 기자

"미국 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딴 폴 햄은 오전 3시 오하이오 고향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그의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살갑지가 않았다. '폴, 우린 오늘 밤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야.' 폴은 '저도 마찬가지예요'라고 했다."

30일자 미국 타임지가 19일(한국시간) 있었던 아테네 올림픽 체조에서의 오심 논란을 소개하며 전한 내용이다.

6일 뒤인 24일 개인 결승에 출전한 폴은 다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완벽에 가까운 철봉 연기를 보인 알렉세이 네모프(러시아)가 9.725점을 받으며 3위에 그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다음 순서인 폴은 그치지 않는 야유 속에 어쩔 줄 모르며 1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조국에 첫 남자 체조 개인종합 금메달을 안긴 폴에게 이번 올림픽은 끝까지 지옥이 될 판이다.

오심의 파문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관중이 심판을 믿지 않는 사태로 발전했다. 스스로 오심을 인정하고도 순위 번복을 거부하는 국제체조연맹(FIG)의 태도가 자초한 일이다.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인'이 되고만 폴이나 '사실상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한국의 양태영뿐이 아니다. 관중도, 세계의 체조 팬들도 점점 더 추락하는 체조연맹의 권위를 지켜보고 있다. 올림픽 경기 도중 심판진을 향해 터져나온 관중의 야유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그 야유가 무슨 뜻인지를 모를 리 없건만 FIG는 침묵하고 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양태영이 추가로 금메달을 받을 가능성이 큰 상태다. 그 경우 양태영 개인에게나 한국 체조에나 사상 첫 금메달이라는 영예는 주어진다. 하지만 폴 햄도, 양태영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체조경기를 즐겨야 할 팬들도 이미 실망에 찬 패자가 돼버렸다.

어느 경기에서든 오심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잊힐 수도,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108년 만의 귀향'이란 각별한 의미를 가진 이번 올림픽이 명예롭지 못한 상처를 남기느냐 마느냐가 지금 FIG의 결정에 달려 있다.

최준호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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