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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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7) 5.16의 총성

5월 16일 오전 4시. 머리맡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전화를 건 사람은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있던 김형일 장군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든 내게 대뜸 "총소리 안들려" 하고 물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충정로 내 집 주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金장군은 "변란이 난 모양이야. 장도영이가 어젯밤 특무대에서 백선진이하고 무슨 모의를 하는 것 같더니…. 우리 집으로 와서 사태수습을 의논하는 게 어때" 하고 말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金장군은 사태에 대해 내심 짚이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혼잣말 비슷하게 "사관학교부터 가봐야겠는데"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육사로 가기 위해 곧바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서대문 로터리를 통과한 내 차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막혀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중앙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태평로 일대에 무장한 군인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공중에다 총을 쏘아대며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나는 운전병에게 차를 북한산 쪽으로 돌리라고 했다. 의정부로 우회해 태릉으로 갈 작정이었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위원장 명의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운운하는 6개항의 혁명공약이 되풀이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가 의정부 어귀에 들어섰을 무렵 나는 문득 라이언 군단장을 생각해냈다. 미1군단장인 그를 만나면 상황파악이 될 것 같았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군복을 단정히 입고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시기가 나쁜데 (Time is bad)"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해병대.6군단 포병단 등 1천7백명 정도가 반란을 일으켜 서울 시내에 진주한 상태라고 했다.

주모자는 박정희 장군이고 장도영 총장의 태도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朴장군이 대체 어떤 사람이냐" 고 물었다. 아마 朴장군의 남로당 전력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6.25 때 싸운 사람들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태릉 육사에 도착해보니 몹시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나는 즉각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라이언 군단장에게 들은 상황을 얘기해주고 각자 의견을 개진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참모들은 한결같이 올 게 온 것이라느니 어서 육군본부에 들어가 혁명동참 의사를 밝히라느니 하는 얘기들만 했다.

10시쯤에는 육사생도 대표의 교장면담 요청이 있었다. 교장의 직접 지시가 없으면 수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육사에는 18기에서 21기까지 총 8백여명의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나는 즉시 생도들을 강당에 집합해 놓고 훈시를 했다.

"국군장교 일부가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나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의 비상사태는 선배들에게 맡기고 제군들은 수학수도 (修學修道)에 힘쓰는 것이 생도로서 본분을 다하는 일이라고 본다. " 내 말을 들은 생도들은 수업을 받기 위해 일제히 교실로 들어갔다.

장도영 참모총장과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1군사령관인 이한림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李장군은 "좀 두고보자" 고 했다. 답답해진 나는 "여보, 두고보긴 뭘 두고봐요. 이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원칙의 문제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마침 처남인 6군단장 김웅수 장군과 통화가 됐다. 金장군은 6군단 포병단이 문재준 (文載駿) 대령 지휘 아래 쿠데타에 참가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장교들의 동향을 묻자 그는 "3분의1은 지지, 3분의1은 반대, 3분의1은 중립" 이라고 대답했다.

한편 군사혁명위원회는 육본에 앉아 육사생도 혁명지지 시가행진 지시를 잇따라 내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육본에 직접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글=강영훈 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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