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6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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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0장 대박

"그러면 형씨는 저 여자의 가족도 아니란 얘긴데?" "난 기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이오. 저 환자를 기도원까지 데리고 가던 중이란 말이오. " "요사이 한창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말썽 많은 기도원이란 말입니까?"

"말썽이 많든, 물의를 빚고 있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전화 한 통화만 걸면, 멀쩡한 사람까지 잡아 가둔다는 기도원 그거 불법 아닙니까?" "글쎄, 불법이면 어떻고 아니면 대수요? 그래서 신고라도 해보겠단 말이오? 이 여관에서도 미성년자들을 나보란듯이 출입시키고 있는 것 같던데?"

한철규의 대응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대담했기 때문에 모처럼 기선을 잡고 제압하려 들었던 사내는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결국은 더 이상 소동을 피우지 않고 쥐죽은 듯이 있다가 여관을 나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며 적선 빌듯 하였다.사내를 끽소리 못하게 주질러앉혀 버린 한철규는 희숙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잡아떼고 오도카니 앉았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한철규를 힐끔 일별했다. 너무나 태연했으므로 삼십분 이상이나 울음을 터뜨리며 소동을 피웠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방 윗목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초조감에 부대낄수록 말문 열기가 쉽지 않았다.

"미안해요, 선생님. 모두 제 탓이에요. 종업원한테 얻어맞지는 않으셨죠?" "이제 안정을 찾았습니까?" "집에 있을 때도 그랬던 걸요. 그이가 결혼식 치르자마자 중국으로 떠난 뒤에 늦은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넋놓고 앉아 엉엉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결혼이란 것도 그렇고 인생이란 게 허무하기만 하고 별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거든요. 집에서 새던 바가지는 들에 나가서도 샌다는 언니말이 맞네요. 여관에 들어와서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왜 그렇게 외롭고 서러운지 나도 모르겠는걸요."

"보통 사람들은 가볍게 지나치는 일상사들을 제수씬 사사건건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볍게 받아넘긴다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멍청하거나 미련한 위인들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들 나름대로는 세상 살아가는 처세술이고 방법일 뿐이지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이 병일 수도 있지요. 다른 객실 사람들은 여관에 강도가 들었거나 치한이 침입해서 제수씨가 당한 줄 알았답니다. "

한철규 스스로도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지절거리고 있는지 속으로는 쓴웃음이 나오는데, 아니나다를까 희숙이는 말꼬리를 잡고 흔들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지않게 넘어가야 할 일들을 너무 심각하게 여겼네요. 난 곁에 사람만 있으면 불안하지 않거든요. " "곁에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서럽다는 얘깁니까, 불안해서 터져나온 울음소리였다는 얘깁니까. 혼란시키지 말고 한 가지만 말해야지요. 우리가 잠자자고 들어온 여관에서 여태껏 잠은 안자고 북새통만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화나셨나 봐요?" "솔직히 다른 사람 아닌 내 자신에게 화도 납니다. " "절 미워하시나 봐요?" "아직은 밉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런 불상사가 계속되면 미워질지도 모르지요. " "제 탓도 있지만 한선생님 탓도 있습니다. 네 분이 모여서 분배할 돈이 대충 얼마나 된다는 것을 진작 귀띔해 주었어도 제가 그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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