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정당 '이념종말' 현상…사안별로 여야 '합종연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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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정가에 이른바 '이념의 종말'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색깔이 강했던 공화당과 진보색채를 띠어 왔던 민주당의 정책과 주장이 갈수록 뒤엉켜 서로 경계가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낙태금지운동 등으로 강경 보수파로 명성을 쌓아온 공화당의 헨리 하이드 하원의원이 최근 동성연애자이며 열렬한 진보주의자였던 민주당의 바니 프랭크 의원과 손잡고 연방정부의 재산몰수권한 폐지법안을 공동발의, 미 정가에 '적과의 동침' 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전통적으로 노동조합과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던 민주당은 최근 철강 수입쿼터 문제를 놓고 철강노조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전을 지지했던 공화당 보수파들이 얼마전 유고 공습 때에는 오히려 신중론을 펼쳤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특집기사를 통해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계를 뛰어넘는 '크로스 오버' 현상과 정치인들이 이념이 아닌 사안별로 뭉치는 '합종연횡식 정책제안' 현상이 21세기를 앞둔 미국 사회의 도도한 흐름이 되고 있다" 고 전했다.

이 신문은 '역사의 종말' 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조지 메이슨대) 의 시각을 빌려 "이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추구 여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정치이념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고 진단했다.

보스턴대의 정치학자 앨런 울프는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가 이제는 정치이념이 개입되는 큰 이슈 대신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는 작은 정책에만 관심을 보이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고 주장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 (鄧小平) 의 '흑묘백묘 (黑猫白猫)' 론이 미국의 공식이념으로 자리잡을 날도 멀지 않다는 것이다.

울프 교수는 내년 미국 대선은 이러한 탈이념 경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첫 선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 나선 조지 부시2세가 낙태반대 등 공화당의 전통적 주장에 대해 지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으며, 민주당이 복지향상이라는 이념 대신 일할 기회 제공 확대라는 '제3의 길' 을 외치고 있는 것이 그 사례라는 것.

한편 상원 윤리위원장인 공화당의 밥 스미스 의원은 13일 "공화당이 최근 핵심적인 보수주의 색채를 포기하고 낙태와 총기문제 등에 대해 미지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공화당을 탈당했다.

공화당 상원의원의 탈당사태는 46년만에 처음이지만 '보수이념 사수' 라는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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