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오탁번 '은행나무 - 빙하기…'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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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할아버지 산소를 가는 언덕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번성한 자손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인 듯

다닥다닥 해마다 은행이 열린다

근처에 은행나무 수놈이 없지만

강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늠름한 제 짝으로 생각하고

정받이를 하는 은행나무

- 오탁번 (吳鐸藩.56) '은행나무 - 빙하기를 꿈꾸며3' 중

이 시만으로 말하자면 시적 긴장을 다 놔두고 순수하게 산문으로 풀어놓은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암컷 은행나무 한 그루로도 제 물 속 그림자를 수놈으로 삼아 사랑의 결실인 은행 열매를 다닥다닥 달고 있다는 신기한 사건이 돋보인다.

은행은 뭔가.

그야말로 빙하기에 멸종된 다른 생물과 달리 자자손손 살아남아 오늘의 사람에게 피를 맑게 하는 약이 아니던가.

아마도 이런 은행나무로 하여금 무상의 시간을 적멸의 시간으로 이어가려는 뜻인가 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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