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6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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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0장 대박

전세로 얻었다는 살림방의 치장은 아기자기함의 정도를 넘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방의 구조와 용적을 의식하지 않고 들여놓아 고집스럽게만 보이는 큰 경대 앞으로 용기의 색깔과 모양새가 천차만별인 견본 화장품들이 산만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경대 오른편으로 배치한 문갑 위에는 허리를 조아린 한 쌍의 신랑 신부 인형이 유리곽 속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바닷가에서 주워온 소라와 조개껍질들이 하얀 뱃속을 드러낸 채 진열되어 있었다. 방 윗목에는 문짝 열쇠구멍마다 노리개를 드리운 옷장과 이불장이 있는데도 아랫목에는 또다시 보자기를 씌운 간이 옷걸이를 배치하고, 허드레 옷들을 걸어두고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방송국에서 사은품으로 증정하는 전자시계와 결혼기념으로 받은 투박한 형태의 벽시계가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화장대 왼편으로는 방안에 들여놓은 신발장이 보였는데, 그 속에는 여성용 신발들만 다섯 켤레나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천장까지 치달은 옷장의 높이가 출입문의 크기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눈대중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부엌으로 드나들며 점심 밥상을 마련하고 있던 희숙이 낌새를 알아채고 말했다.

"가구들을 들여올 땐 문을 떼고 벽을 쳤었지요. " 전세방의 규모는 염두에 두지 않고 욕심껏 가구를 골랐고, 벽을 치고 가구를 들여놓은 과감한 파격은, 그녀의 평소 성품이 합리적이거나 순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극적이지만 독선적일 것이었다. 따라와서 품앗이를 하겠다는 서문식당의 언니를 따돌리고 혼자서 마련한 점심밥상의 반찬들은 간이 짜고 양념은 매웠다. 굳이 사양했었으므로 부득이 혼자서 밥상을 당기는데, 궁금한 것이 많은 그녀가 물었다.

"언제 떠나실 건데요?" 그제서야 한철규는 속으로 낭패를 느꼈다. 언니의 권유가 있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한철규를 따라 서울 나들이를 감행할 작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아침 여관에서 초인사도 건네기 전 거두절미하고 물었던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심 먹고 떠날까 해요. 더 이상 지체할 볼일도 없지 않습니까. " "아까 식당에선 언니가 얄미워 싫다 했지만, 한선생님 따라 서울 가봤으면 해서요. " "물건 시세를 알아 보겠다는 일 때문입니까?" "언니한테 모든 걸 맡기고 기다렸다간 나중에 봉환씨나 형부가 돌아오면 왕창 깨질거예요. 날강도가 와서 가게를 통째로 떠메고 갈까 봐 가게를 비우지 못하는 성미거든요. "

"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구요?" "한선생님을 믿지 못했으면 모셔다가 점심 대접까지 했겠어요. " "제수씨로선 괜찮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서울까지 가서 시세를 알아 본 결과가 보잘 것 없을 수도 있겠지요. "

"언니가 가라고 했으니, 남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경쓸 것 없겠구요. 성과가 별로라 해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요. 오죽 다급했으면 형부가 국제통화까지 넣었겠어요. " 말인즉슨 그럴싸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와의 동행을 현실화시켰을 때, 감당해야 할 부담을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숙과 결혼은 했었으나, 박봉환의 가슴에는 아직도 승희의 배신이 할퀸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배신은 물론 한철규란 존재가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반란이기도 했다. 그런 박봉환이 나중에라도 희숙과 동행으로 서울 나들이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또 어떤 불상사가 불거질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희숙은 벌써 침묵을 허락으로 알고 가방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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