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재도전] 3. 말레이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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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상 88층.지하 4층에 높이 4백52m.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도심에 우뚝 선 페트로나스 트윈빌딩은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다.

지난달 9일 그곳에서 마주친 대학생 로즈란 빈 아리프 (22) 는 빌딩 꼭대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들이 최첨단 말레이시아 신공항을 통해 들어와 이 빌딩을 우러러본다.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

실제 경제위기 이후 꿈쩍도 않던 소비심리가 최근 꿈틀거리고 있다.

페트로나스 빌딩 지하 스포츠웨어 매장의 종업원 무하마드 사랄리 (32) 는 "지난해 하루 1백50명 정도였던 고객이 올들어 하루 2백50~3백명으로 늘었다" 고 말했다.

잘란 암팡윗마 센트럴 거리에 위치한 국민차 '프로톤' 대리점의 딜러 안와르 빈 라자크 (27) . "연초 할부 이자율을 낮추자 판매량이 70%나 급증했다" 며 흐뭇한 표정이다.

도심 서쪽 외곽 수방자야로드에 위치한 선웨이 라군 리조트의 탄스리 다토 나바랏남 부회장은 "지난해 20%를 밑돌던 객실점유율이 40%로 회복됐다" 며 앞으로의 경기를 낙관했다.

97년 7월 헤지펀드의 집중 공격으로 링기트화가 폭락한데 대한 대응으로 지난해 9월 고정환율제를 전격 도입, 외국자본의 출입을 봉쇄한 자본통제와 함께 내수진작에 나선 정책이 효력을 발휘한 때문이라고 말레이시아 당국자들은 말한다.

증시도 출렁인다.

증권거래소에서 만난 중개인 차우 린 분 (31) 은 "지난해 9월 280이던 주가지수가 현재 810을 넘어섰다" 며 "자본통제 이후 증시로 쏟아져 들어온 해외 자본이 더 늘어났다" 고 말했다.

총리실 산하 국가경제위원회 (NEAC) 연구그룹의 마하니 자이날 (여) 대표는 "환율이 안정되고 증시의 불확실성이 사라지니 금리가 안정되고 수출도 호조를 보이며, 소비심리도 회복되고 있다" 고 해석했다.

그러나 일부 지표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체감경기는 아직 뜨뜻미지근하다.

중소전자업체의 회계담당자라는 모하메드 압둘라 (27) 는 "회사 매출은 지난해 중반보다 20%가량 늘었지만 월급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고 말했다.

내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투자.생산 등 실물부문은 아직 요지부동인 때문이다.

실제 말레이시아의 제조업 생산 증가율은 올 1월 - 17.1%에서 2월들어 4.9%로 회복되는가 싶더니 요즘은 다시 0~1% 내외에서 맴돌고 있다.

얼어붙은 부동산시장도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 완공된 페트로나스 타워의 한쪽 동은 아직 절반 이상 비어있다.

안내 데스크의 시티노르 할리자 (여.28) 는 "당초 입주하기로 했던 업체들이 경제난을 이유로 포기하거나 연기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또 있다.

갑작스런 자본통제로 자금이 묶인 외국인 투자가들의 반발이다.

일본 히타치 (日立) 태국법인의 기획개발 매니저인 오노 겐지 (大野健二) 는 "투자확대를 망설이는 외국기업들이 많다" 고 말한다.

언제 또 돌발조치가 취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민간부문의 구조조정도 다른 아시아국가보다 부진하다.

한 외국 기업인은 "구조조정을 할 경우 총인구의 60%를 차지하면서도 경제력에서 중국계에 뒤지는 말레이계의 희생이 불가피하고, 이 경우 정치적 불안정이 우려돼 정부가 구조조정에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고 지적했다.

말레이시아 주재 한 외국 주재원은 "마하티르 총리로선 안와르 부총리 구속때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데모' 를 보고 '여기에 경제위기까지 겹치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꼴이 될 위험이 크다' 는 생각을 했을 것" 이라며 "이에 승부수로 띄운 자본통제정책이 현재로선 대성공이었지만 그 부작용은 한참 후에 나타날 것" 이라고 주장했다.

'국제 투기자금의 유입을 끊고 국내 금융시장 활성화 및 공공투자로 소비를 자극하는' , 말레이시아 특유의 '만들어진 경기회복' 이 과연 '진짜 경기회복' 으로 이어질지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콸라룸푸르 =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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