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국보 “100세 넘어 책 두 권, 지금도 글 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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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1면

중앙SUNDAY는 10월 1일 건국 6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 대륙의 현인(賢人)들을 연쇄 인터뷰했다. 중국의 새로운 꿈과 도약을 짚어 보기 위해서다. 첫 번째는 중국어 표기법을 만든 저우유광(周有光·사진) 선생이다. 국보로 추앙받는 저우 선생은 104세다.

新중국 60년, 대륙의 현인을 만나다① 문자 개혁의 주역, 저우유광

“마르크스는 말을 잘못했고, 스탈린은 일을 틀리게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길을 잘못 따라갔다.”

노(老)학자 저우 선생이 한평생을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청(淸) 말에 태어난 그는 파란만장한 중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일본 유학 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한 은행에서 일하다 1949년 조국 부흥의 꿈을 안고 귀국했다. 저우 선생은 지난 16일 오후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본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필자)와 본지 기자를 만나 “당시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좌경유치병(左傾幼稚病:어린애처럼 분별없이 좌익으로 기우는 병)에 걸렸다”고 토로했다.

이날 인터뷰는 베이징 중심가 둥청(東城)구의 한 골목에 있는 저우 선생의 아파트 서재에서 90분간 진행됐다. 80년대 초 지었다는 6층짜리 아파트는 낡았지만 깨끗했다. 저우 선생은 10㎡(약 3평)의 좁은 문간방을 서재 삼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담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우 선생은 무명 천으로 만든 색바랜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책상은 50년 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100세가 넘어 두 권의 책을 냈고 올해 말 또 한 권을 출간할 계획이다.

그의 지적인 호기심과 열정은 끝이 없었다. 요즘도 매달 한두 편의 글을 써 국내외 잡지에 기고할 만큼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다. 지금까지 쓴 책은 모두 30여 권. 원래 금융경제학을 공부했으나 마오쩌둥의 ‘문자·언어 통일’ 구상에 따라 58년 한자 병음(倂音) 표기법을 완성시켰다. 한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덕에 중국어는 국제화·디지털화의 길을 달리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저우 선생은 47년 아인슈타인과 만난 일, 중국의 발전을 보는 시각, 한국과의 인연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대화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요약한다.
김명호: 요즘 무슨 글을 쓰십니까.

저우유광: 여러 잡지에 쓰는 데 영문으로 쓸 때도 있다. 이달엔 단오절에 관한 글을 썼다. (책상 위에 ‘염황춘추(炎黃春秋) 9월호’를 펼치며) 생각나는 대로 대충 쓴 거다. 제대로 된 글은 아니다.

김: 선생님은 아직도 컴퓨터를 쓰고 계신가요.

저우: 컴퓨터는 저쪽 방에 있는데 사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게 불편하다. 시력이 안 좋아서 화면에 여러 줄이 있으면 줄을 헷갈린다. 그래서 이 작은 컴퓨터(전동타자기)를 쓰고 있다. 손으로 쓰는 것은 잘 안 된다. 자료도 여기에 저장해 쓰고 있다.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물건이다. 병음으로 타자를 하기 때문에 편하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 다섯 배쯤 속도가 빠른 것 같다.

김: 컴퓨터로 e-메일을 쓰십니까.

저우: 미국에 사는 손녀·증손녀에게 가끔 e-메일을 쓴다. 아들(76세)은 베이징 북쪽의 중국과학원에 살고 있다. 아들에겐 아들의 세계가 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하느님이 뭔가 착각을 해 나를 데려가는 걸 잊어버린 것 같다.(웃음)

김: e-메일은 아인슈타인도 못 썼던 겁니다.

저우: 맞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대 객원교수로 있을 때, 미국이 전쟁할 때인데 내 친구 가운데 허롄(何廉:훗날 난카이대 경제연구소장 등을 역임)이 있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였다. 그 친구도 프린스턴에서 가르치면서 아인슈타인과 친하게 지냈다. 그가 ‘아인슈타인이 너랑 대화하고 싶다는데 어떠냐’고 하기에 ‘나야 당연히 좋지’라고 응답했다. 그때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토요일이면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프린스턴까지 갔다. 그때 나는 월스트리트의 은행에서 근무해 맞춤복으로 멋있게 차려 입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옷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아주 편한 복장으로 지냈다. 인상도 좋고 사람도 좋았다. 물리학을 잘 몰라 그냥 세상 사는 얘기를 했다.

김: 그때가 언제인가.

저우: 아마 1947년일 거다. 아인슈타인은 참 대단했다. 그가 한마디를 하는 바람에, 어떤 한마디였나 하면…. 원자탄을 개발하려면 아주 많은 돈을 써야 해 미 정부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그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 아인슈타인을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원자탄을 개발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한마디만 했다. “가능합니다(That’s possible).” 그래서 원자탄이 만들어졌다. 지식인의 한마디가 이렇게 중요한데,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을 때려 부수었다. 제일 바보 같은 일이었다. 진시황도 마오도 지식인을 탄압했다. 아인슈타인과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문혁 때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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