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책넘나들기] '새 세상, 새 규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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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 '세상, 새 규칙' -매리너 휘트먼 著(하버드경영대 출판부)

외환위기 속에서 구조조정 문제가 제기됐을 때, 현대그룹 사장단회의에 제출된 방안을 정주영 (鄭周永) 회장이 한 마디로 요약했다고 한다.

"알았어, 미국식으로 가잔 말이지?" IMF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제시한 경제운용방향은 한국인에게 내키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그 방향으로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재벌개혁 등 아직 미진한 것으로 지적되는 여러 분야에서 더 많은 변화가 논의되고 있다.

IMF의 요구는 '미국식' 변화로 귀착된다.

미국자본을 주역으로 하는 '세계화' 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국가의 장벽을 철폐하고 미국자본의 주도권에 의존하는 새 체제에 편입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에 따르든 저항하든, 이 요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식' 이란 어떤 것인가?

미국자본의 속성은 무엇인가?

이것이 사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미국의 기업풍토와 자본속성 자체가 근년 큰 변화를 겪어 왔기 때문이다.

미시건대학 경영학 교수 매리너 휘트먼의 '새 세상, 새 규칙' 은 이 변화를 잘 그려준 책이다.

닉슨 행정부의 경제관료와 제너럴 모터스 (GM) 부사장을 역임한 휘트먼 교수는 정책과 실물.이론을 두루 섭렵했다는 점에서 이 복잡한 변화를 그려내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인물이다.

79년부터 92년까지 자신이 GM에 근무하는 동안 미국기업계는 패러다임의 전면적 전환을 겪었다고 휘트먼은 지적한다.

70년대까지 미국의 대기업은 인자한 '빅 브라더' 였다.

근로자들에게 고임금과 풍성한 복지혜택 등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근무조건을 제공하는가 하면 대형 문화사업과 사회사업을 통해 국가와 지역사회에도 자발적으로 공헌했다.

하청회사들과도 관대한 거래조건을 유지했다.

요컨대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이 이 시기 미국 대기업의 패러다임이었다.

이런 산타클로스 노릇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시장에서 미국 대기업의 독과점적 위치 덕분이었다.

유럽과 일본이 전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미국 자본과 기술의 독보적 위치는 20여년간 지속됐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외국산업의 경쟁이 미국 본토까지 쳐들어오면서 미국산업이 위기에 처한다.

생산성은 아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여유있게 만족시켜 온 관행이 경영의 부담이 된 것으로 휘트먼은 진단한다.

착한 역할을 거부하는 '빅 브라더' 는 이제 '터미네이터' 일 뿐이다.

피고용자들에게나, 지역사회에게나, 국민에게나 사랑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힘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그 안중에는 국경도 없다.

'주주의 이익' 만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것이 이제 '미국식' 기업이라고 휘트먼은 소개한다.

미국산업의 장래를 위해 이 변화방향을 긍정하는 휘트먼도 빈부격차의 심화현상에는 우려를 표명한다.

90년대 들어 새 '미국식' 기업활동이 승승장구하는 까닭은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무력해진 덕분에 사회적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한도가 늘어난 데도 있지 않나 싶다.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을 진짜 '미국식' 으로 철저히 수행하려면 먼저 검토할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긴장을 견뎌낼 여지가 얼마나 있는가?

김기협 <문화전문위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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