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마키아벨리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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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만을 설파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담론' 이라는 정치학의 고전을 저술한 것은 1531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금 통치권의 위기를 맞고 있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우리들 모두가 귀담아 들을만한 가르침을 남겼다.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종교단체와 공화국들이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거듭 거듭 출발점 (Beginnings) 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단체와 공화국을 출발점으로 되돌리는 개혁이 건강한 개혁이다.

이런 개혁없이 종교단체와 공화국들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햇빛보다 더 분명하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종교단체는 지금 상황에서는 유력한 비정부시민단체 (NGO) 들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모든 조직이 미덕을 갖고 출범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패하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 같은 충격 아니면 국내 지도층의 선견 (先見) 의 힘으로 공화국을 출발점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한동안 갈리아 (프랑스)에 점령당한 것이 오히려 로마가 거듭나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金대통령도 출발점의 순수한 열정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 우리의 도덕상황은 심각하다. 로마제국이나 중국의 제국들에서 본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반드시 망하고, 반면에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 나라들의 초창기 같이' 도덕적으로 강하면 반드시 융성의 길이 있다. " (1981년 부인에게 보낸 옥중편지) 그는 평민당총재 시절에도 그런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우리 국민이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아 오르는 민주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88년 6월 국회연설)

수사 (修辭)가 현란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지만 그가 머리 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잘 드러내는 떨림이 있는 말로 들린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고 1년반이 지난 지금 우리 사정은 어떤가.

우리의 도덕적 현주소는 그가 81년 국회연설에서 개탄한 도덕적 위기와 비교해 전혀 개선된 게 없다.

고위관리의 부인들이 내놓고 사치를 하고, 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수십억원을 썼다는 의혹을 받고, 현직장관이 대기업들을 대표하는 단체로부터 거액의 '격려금' 을 받고, 검찰이 추태를 거듭하고, 두 사람의 각료가 도덕성의 문제로 해임되는 사회분위기다.

가치에 대한 냉소주의는 가치에 대한 허무주의로 더 악화되고 있다.

가치의 공위 (空位) 시대,가치의 무정부상태 같다.

金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는데 소외돼 한숨짓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만한 조치가 아직은 약속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를 해결한 대통령이 어쩌다 국민의 칭송을 받기는커녕 취임 1년반만에 정권의 도덕성 문제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 반성한다는 사과성명을 내게 됐는가.

문제의 원인은 金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그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히 알았고, 인사는 공정했고, 자신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심 (私心) 없이 공익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은 정말로 '준비된 대통령' 으로 실수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는 스스로를 과신하고 자만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 시절 그의 부인이 연루된 스캔들을 추적하는 언론과 여론을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였겠는가.

金대통령이 심기일전 (心機一轉) 을 약속한 것은 다행이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우선 자신을 이겨야 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충고대로 북한의 도발과 정치위기를 거울삼아 초심 (初心) 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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