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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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2) 왜곡된 전황보도

개전 (開戰) 이틀째인 26일 오전 6시 채병덕 (蔡秉德) 참모총장이 참모 전원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나는 서둘러 육본 2층에 있는 참모총장실로 갔다.

총장실엔 뜻밖에도 신성모 (申性模) 국방장관이 먼저 와 침통한 표정으로 蔡총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내 탁자 위엔 청주와 술잔들이 죽 놓여 있었다.

참모진이 다 들어서자 申장관은 각자에게 술을 따르라고 하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전황은 예측을 불허합니다. 2차대전 때 폴란드 정부가 영국에 망명해 시기를 기다린 것과같이 우리도 어디서든지….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각하께서는 이미 대전 방향으로 떠나셨습니다…. " 나는 申장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정부가 못견뎌 결국 제주도나 태평양 어느 지역으로 피난을 가는 모양' 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이선근 (李瑄根) 정훈국장이 주먹으로 "탕" 하고 책상을 한차례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장관, 한마디 하겠소. 정훈국장인 내가 백만학도를 동원해서라도 최후까지 서울을 사수하겠습니다. 시민들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 李국장의 말은 거의 외침과도 같았다.

모두들 비장감에 휩싸인 채 말이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자 蔡총장이 나서서 "정부는 대전으로 가지만 우리 국군은 더 버텨봅시다" 며 회의를 끝냈다.

사실 정훈국을 맡고 있던 李국장이 그런 말을 한 건 당시 그가 느껴야 했던 일말의 자책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할 때부터 정훈국은 시민들을 안심시킨다며 계속해 사실과 다른 발표를 내놓고 있었다.

육본의 지시로 KBS는 "침입한 적이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는 방송을 되풀이하는가 하면, 신문들도 27일까지 '國軍 精銳部隊 北上' '總反擊戰 展開' '海州 一角 突入' '議政府 奪還' 같은 제목의 호외와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고 있는 판이었다.

특히 '해주 일각 돌입' 운운하는 기사는 순전히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옹진지구에 있다 적에게 떼밀려 후퇴준비를 하고 있던 17연대장 백인엽 (白仁燁) 대령에게 최기덕 (崔起德) 기자가 "금후 계획이 뭐냐" 고 물었다.

쾌활한 白대령은 평소 성격대로 "해주 방면으로 공격할 작정" 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崔기자가 서울에 와 그 얘기를 전했고 '승리' 소식에 목말라 하던 육본이 이를 그대로 보도해 버린 것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이 기사를 '6.25 북침설' 에 대한 증빙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참모회의에 이어 육본에서는 군원로회의가 열렸다.

예비역으로는 이범석.이청천 (李靑天).신태영 (申泰英).김석원 장군이, 현역으로는 申국방. 蔡총장을 비롯해 김홍일 (金弘壹. 참모학교장).이응준 (5사단장) 장군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이범석.김홍일장군 등은 "우세한 공산군에 맞서려면 한강.금강에 방어선을 치고 계속 지연 전술을 펴야 한다" 고 역설했다 한다.

침통하기만 하던 육본 분위기는 오후 들어 백팔십도 달라졌다.

미국측이 蔡총장에게 "오늘 중 B - 29 1백대로 지원폭격을 해주겠다" 는 소식을 알려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사기가 올랐다.

蔡총장은 이 소식을 직접 일선 부대에 알려주어야겠다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蔡총장과 함께 지프를 타고 미아리로 가는데 서울시내는 벌써 수라장이 돼 있었다.

보따리를 멘 피난민들이 끊임없이 북쪽에서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정릉~미아리~청량리를 연결하는 이른바 미아리방어선에선 이응준 장군과 유재흥 (劉載興.7사단장) 장군이 3천명쯤 되는 병력을 지휘해 싸우고 있었다.

B - 29 지원폭격 소식을 전하자 두 분은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이날 온다던 B - 29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무슨 소리만 나도 하늘을 쳐다보던 우리는 애간장이 탔다.

이렇게 26일 밤이 깊어가자 삼각지 육본은 다시 불안감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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