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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삼거(四不三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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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조선 영조 때 호조 서리를 지낸 김수팽은 ‘전설의 아전’이다. 청렴하고 강직해 숱한 일화를 남겼다. 호조판서가 바둑을 두느라고 공문서 결재를 미루자 김수팽이 대청에 올라가 판서의 바둑판을 확 쓸어버렸다. 그러고는 마당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졌으나 결재부터 해달라” 하니 판서도 죄를 묻지 못했다.

김수팽이 숙직하던 밤, 대전 내관이 왕명이라며 10만금을 요청했다. 그는 시간을 끌다가 날이 밝고서야 돈을 내주었다. 야간에는 호조의 돈을 출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관이 사형에 처할 일이라고 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김수팽을 기특히 여겼다(이수광, 『조선의 방외지사』).

김수팽의 동생 역시 아전이었다. 어느 날 그가 아우의 집에 들렀는데 마당 여기저기에 염료통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염색업을 부업으로 한다”는 동생의 말에 김수팽은 염료통을 모두 엎어버렸다. “우리가 나라의 녹을 받고 있는데 부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먹고살라는 것이냐?”

김수팽의 일갈에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청빈한 정신이 담겨 있다. 조선의 관료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를 불문율로 삼았다. 재임 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四不)는 ▶부업을 하지 않고 ▶땅을 사지 않고 ▶집을 늘리지 않고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 것이다. 풍기 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사표를 냈다. 대제학 김유는 지붕 처마 몇 치도 못 늘리게 했다.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三拒)는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경조사의 부조다. 청송 부사 정붕은 영의정이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다’고 답을 보냈다. 우의정 김수항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명 한 필을 보낸 지방관을 벌주었다(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 2』).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공직사회에서 사불삼거의 전통은 사라지고 ‘사필(四必)’이 자리 잡은 듯하다. ‘위장전입·세금탈루·병역면제·논문표절’의 네 가지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고위 공직자 후보가 되기 어려운 것인가 싶다. 청문회에서 잘못이 밝혀진 경우도 어영부영 넘어가는 모습을 본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사필(四必)을 갖추어야 정사를 돌보는 자리로 간다’는 사필귀정(四必歸政)이 된 것인가.

구희령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