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박순용 검찰총장 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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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순용 (朴舜用) 총장 귀하.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리, 검찰총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한 조직체의 수장 (首長) 이 된다는 것은 개인과 가문의 광영 (光榮)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의 임기는 폭탄주로 만신창이가 된 '대검찰청' 현판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비리 혐의자들이 두려워 떨며 섰던 포토라인 앞에 검찰 전체가 피의자로 섰습니다.

내 탓은 아니라고 자위하지 마십시오. 검찰에 평생을 걸었던 총장 자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사실 검찰권은 막강합니다.

그 막강함은 과거 독재정권이 검찰을 정권의 도구로 쓰기 위해 준 권한입니다.

이제껏 검찰과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미 확보된 어떤 기득권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 조직 이기주의의 방어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독점화되고 집중된 검찰 권력을 다시 나누고 외부의 견제를 자청하지 않는 한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해소될 수 없습니다.

총장 취임 직후 보여준 모습도 민망합니다.

옷사건에 대해 총장은 처음엔 수사거리도 아니라는 태도로 임했습니다.

장관 부인을 보호한다고 전대미문 (前代未聞) 의 대역까지 연출한 것도 총장 책임입니다.

애초 납득 불가능한 수사일 줄 알면서도 그것을 떠맡아 수사검사로 하여금 곤혹의 진땀을 흘리게 한 것도 총장입니다.

전 공안부장의 발언을 하루도 안돼 근거없다는 발표부터 시킨 것도 총장입니다.

이같이 취임하자마자 역대 총장이 걸었던 상관 보호 - 조직 보전 - 정치 추종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전임 총장의 말로가 朴총장의 장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옷사건, 기획파업 건에서도 드러났듯이 검찰이 애초 수사하기 부적합한 사안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대통령의 훈시나 받는 검찰이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엄두나 낼 수 있습니까. 제대로 수사도 못할 사건에 대비해 특별검사제를 준비했더라면 조직 전체에 불똥이 튀는 불상사는 막았을 것입니다.

검찰 스스로 특검제 요구를 수용해 수사 불가능한 사건의 부담을 덜어내기를 바랍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늘 의혹거리였습니다.

집권당이 바뀌면 표적이 바뀝니다.

대통령이 사정 (司正) 하라면 사정하고, 사정을 그만하라면 그만둡니다.

현재의 권력에는 처량하도록 약하고 과거 권력에는 그토록 집요한 하이에나적 행태는 여전합니다.이렇게 집권자의 칼로 전락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개인과 검찰 전체가 오욕의 회오리에 빠진 오늘의 현실 아닙니까. 검찰과 정권은 장관과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를 거부했습니다.

국민적 검증은 회피하고 대통령 검증만 받겠다는 방식으론 청와대앞 줄서기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자리를 위해 청와대에 줄섰는데, 자리를 차지한 뒤 중립성을 지켜낼 수 있습니까. 검찰 스스로 인사청문회를 받아들이면서 밀실형 인사방식을 혁파해 가야 합니다.

지금 진형구 (秦炯九) 전 공안부장 발언으로 검찰의 전.현직 간부들이 국회 청문회에 서야 하는 수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공안검찰의 최대 피해세력이 집권했을 때, 공안검찰의 권력남용은 어제 일이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노사.학원대책을 기획조종해온 독재정권의 방식을 답습했습니다.

학원과 노동을 우범시하는 독재공안의 틀을 해체하지 않은 채 기획조종을 해온 관행이 오늘같은 지탄의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헌법에서 규정하듯이 학원은 대학자치로, 노동은 노동3권의 자율영역으로 되돌려져야 합니다.

폭탄주만 하더라도 검찰기강 해이 차원에서만 접근될 일이 아닙니다.

폭탄주는 집단적 획일화의 문화적 상징입니다.

폭탄주 앞에는 예외도 없고 개인의 취향도 없습니다.

폭탄주로 상징되는 몰개성적 위계문화는 검사 동일체와 어울려 검찰문화로 자리잡았습니다.

강퇴 (强退) 를 용퇴 (勇退) 로 포장하면서 줄줄이 옷벗기는 관행에서도 봉건적 위계문화의 모습을 봅니다.

이같은 조직문화에서 훈육된 검사로부터 정치적 압력에 맞서는 기개를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으로 검찰은 개성과 다양성이 어우러지는 민주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동안 독점화.정치화.위계화된 검찰구조에 대한 어떤 개혁도 거부했던 과거의 누적이 검찰의 현주소입니다.

지금 개혁을 거부한다면 총장 자신을 포함해 누가 어떤 불명예로 옷벗고, 진땀과 눈물을 흘리는 수치를 내내 이어갈지 모릅니다.

취임식날 폭탄주를 뒤집어쓴 것은 검찰청 현판이 아니라 검찰과 총장 자신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검찰총장은 예비 법무부장관이 아닙니다.

총장직을 최후의 공직으로 알고 검찰의 중립성.공정성을 위해 장렬히 산화 (散華) 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산화의 행렬이 이어질 때 전체 검찰은 국민의 마음 속에서 비로소 되살아날 것입니다.

한인섭 서울대교수.형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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