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안 변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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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권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세상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 .돈선거, 고관집 도둑사건, 옷 로비사건, 조폐공사 파업유도설 등 최근 일련의 사건을 접하면서 국민들이 토하는 탄식이다.

어디 이들 네 사건뿐이던가.

고문조작시비, 도청 및 감청시비, 국회 529호실 사건, 법안 날치기 통과 등등 정권이 바뀌긴 바뀐 건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사건은 꼬리를 물어왔다.

정말 변한 게 너무도 없다.

국민을 들끓게 하는 사건이 꼬리를 무는 원인을 지난 정권들에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날에 형성된 잘못된 관행과 썩은 인물들이 미처 청산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원인을 지난 정권들의 잘못에 돌리려는 것은 책임회피고 적절한 진단도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이 지난 날에 형성된 관행과 그에 젖은 낡은 인물들에 있다면 왜 이제까지 그에 대한 청산 노력이 없었을까. 이제까진 몰랐다거나, 알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건 변명밖에 안될 것이다.

실은 현 집권층이 집권하자마자 스스로가 기득권 세력이 돼 변화를 외면한 채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며 그것을 활용해 온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현 집권세력이 집권 전에는 그토록 비난해 온 관행과 제도에 안주하고 그를 즐기기까지 하는 좋은 보기의 하나가 특별검사제의 도입 거부다.

특별검사제는 현 정권이 야당시절에 가장 힘주어 강조해 왔던 것이었다.

이 제도의 장단점에 관한 논란도 할 만큼은 한 터라 새삼 검토할 것도 없었다.

집권하면서 채택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칼자루를 쥐자 그만 마음이 달라졌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40.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호남과 충청의 지역연고에 의한 표였겠으나 그것이 40.3%의 전부는 물론 아니었다.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상대적 개혁성을 높이 사서 표를 찍었다.

그가 당선됐을 때 변화를 바란 사람들도 그 벅찬 기대 때문에, 변화를 바라지 않고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은 미구에 닥칠지 모를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을 죽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달라진 것은 권력 상층부의 얼굴들뿐이었다.

고관집 도둑사건과 옷 로비사건이 터졌을 때 국민들은 처음엔 그 사건의 내용에 분노했다.

봉급이 뻔한 공직자의 집마다 출처를 납득하기 어려운 현금이 나뒹굴고 장관 부인들은 고급 옷가게나 몰려다니는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국민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으로 그들의 공직생명은 끝장이고 정부로부터는 서슬이 퍼런 쇄신책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서 문책받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여론과 그런 여론을 만든 언론이 마녀사냥이라고 비난받았을 뿐이다.

이제 국민들은 사건 자체에서 드러난 공직사회와 그 주변의 탈선과 부도덕성 그 자체보다 그를 덮고 얼버무리려는 듯한 정부의 태도에 더 분노하고 있다.

이런 자세부터가 구태이다.

또 그런 사건들을 잇따라 겪으면서도 인물교체만 할 뿐 문제의 뿌리를 캐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데 낙담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정권교체를 몇 번이나 더 경험해야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할 것인가.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마지막 1년을 정권이양기로 본다면 실제 일할 수 있는 임기는 4년이다.

그 4년 중 이미 1년4개월이 지났다.

실제 임기의 3분의1이 지난 셈이다.

이제까지는 경제위기의 극복이 국가의 최대과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요구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화합이란 듣기 좋은 이름 아래 '과거' 와 타협만을 계속하는 현재의 자세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의 그릇된 관행과 썩은 인물들이 현 정권내에 그대로 온존하는 한 원인도 현정권이 '과거' 와 무원칙한 타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집권당의 실력자가 오물세례를 받은 사건을 사소한 봉변으로 여겨 넘겨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의 뿌리는 인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제도와 관행에 있다.

서둘러 그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선때의 공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공약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

국민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데 대해 분노보다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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