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8) 고위회담 그후

오늘로써 남북고위급 회담에 관한 얘기를 마감하려고 보니 그동안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남북기본합의서가 아직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1990년 9월부터 시작된 일련의 남북회담은 우리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남북이 서로를 불법 교전단체로 규정해 온 종전의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실체를 비로소 인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그결과 얻은 수확이 바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라는 유난히 긴 이름의 기본합의서였다.

'합의서' 는 그래서 단순한 외교문서가 아니라 남북이 오랜 대결구도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와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는 '한민족의 마그나 카르타' (大憲章) 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4장.25조로 구성된 이 합의서는 핵문제에서 정전협정.이산가족 상봉.군축.언론교류에 이르기까지 남북간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돼 있다.

지난 얘기지만 북한이 남북 총리회담에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89년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 뒤에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크가 처형됐으며 고르바초프와 부시 대통령이 몰타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하는 등 국제적인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에 발맞춰 한반도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려는 6공화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은 88년 이른바 '7.7선언' 을 통해 북한을 동반자로 포용하고 민족공동체를 건설하자는 대북정책을 발표했다.

이어 90년9월 역사적인 한.소 (韓.蘇) 수교를 비롯한 북방정책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내 나름으로는 현재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도 그 뿌리가 바로 여기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총리회담 과정에서는 예기치 않은 부수효과도 있었다.

90년12월12일 서울에서 열린 3차 총리회담 때 일이다.

북한 로동신문의 이길성 부국장과 중앙TV의 최민 기자등 5명은 이날 오전 11시 신라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택시로 서울 평창동 임수경 양 집을 기습 방문했다.

당시 임 양은 불법으로 북한에 다녀왔다고 해서 구속, 수감중이었다.

북한 기자들은 마침 집에 있던 임양 어머니에게서 불고기와 포도주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를 보고받은 나는 '아무 소리 말고 내버려 두라' 고 지시했다.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이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 평양으로 보냈다.

그러나 며칠이 못가 북한은 이 방송을 돌연 중단해 버렸다.

TV로 이 장면을 본 북한 주민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임 양의 집이 으리으리한데다 '반역자' 의 부모들이 붙잡혀 가지도 않고 태연히 집에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나도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내 눈에 비친 북한은 꼭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을 연상케 했다.

90년10월 제2차 고위급 회담 때 평양에 도착해 보니 환영인파도 없고 시내가 몹시 썰렁했다.

함께 간 우리 기자들이 '왜 그렇냐' 고 묻자 북측 안내원들은 '임수경이 석방되지 않아 그렇다' 며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는 갑자기 양복차림의 선글래스를 낀 젊은이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동강변에서는 한 무리의 '넥타이 부대' 가 한가로이 낚시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제와서 보니 당시 북한은 옛 소련의 붕괴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처음부터 마지못해 남북대화에 응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남북이 언젠가 화해.협력의 새 장을 열어가기 위해서라면 그 출발점은 역시 남북기본합의서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글= 강영훈 전총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