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박힌 옷벗고 개성입는다" 연주자 패션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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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실력있는 연주자들에게 무대의상을 '후원' 해주는 기업은 없을까. 연주복이 이제 예복의 틀을 벗어나 점차 개성화.패션화돼가며 연주자들에게 적잖은 부담을 안기기 때문이다.

음악팬들은 지난 97년 7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소프라노 조수미의 '벨칸토 아리아의 밤' 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공연의 테마는 '음악과 패션의 만남'. 조씨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만들어준 드레스를 곡목이 바뀔 때마다 갈아입고 나와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빌랴의 이발사' 중 로지나 역을 부를 때는 플라멩코 댄서차림으로 등장했고 '루치아' 에서는 흰 옷에 핏자국을 뿌렸다. 다소 지나치긴 했지만 조수미 다운 '관객 서비스' 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특히 성악가들은 몸이 '악기' 인데다 오페라 의상에 버금가는 화려함을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옷값' 이 만만치 않다. 관현악 반주의 오페라 갈라 콘서트에선 무대의상에 더욱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는 성악가는 소프라노 조수미.박미혜씨 등. 앙드레 김은 '고객' 의 공연때는 맨 앞좌석을 예약한다.

'라 스포사' 도 성악가들의 단골집이다. 50만원선에서 유행이 지난 것을 골라 약간 고친 후에 입는 알뜰파도 있지만 보통은 한벌에 1백만원 정도. 5~6백만원짜리 연주복도 있다.

현악기 주자들은 어깨와 양팔을 모두 사용해야 하므로 어깨 끈이 없는 톱 원피스를 주로 입는다.

지난해 10월 뉴욕 링컨센터 에버리 피셔홀 무대에 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어깨끈이 없는 톱에 연미복을 결합한 의상을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커리어 우먼의 프로페셔널한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연주복은 일상의 세계에서 비일상의 세계, 예술의 세계로 안내하는 '사제 (司祭)' 들의 예복, '음악의 마술사' 들이 관객에 대해 갖추는 예의의 표현이다. 무대 의상은 외양 (外樣) 을 모두 걷어내고 음악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유니폼인 동시에 연주자의 개성을 마음껏 과시하는 '기회' 다.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연미복 입는 것은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차츰 개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패션 감각이 바뀌고 있다.

연미복 일색의 남성 연주자들 중에서도 지휘자 금난새.임헌정,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처럼 짧은 컬러의 중국풍 패션을 입기도 한다.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도 인민복 스타일의 흰색 양복을 즐겨 입는다.

영국 린제이4중주단은 무대에서 화려한 실크 셔츠에다 캐주얼 바지를 즐겨 입는다. 또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일본인 디자이너 이세 미야케가 만든 주름잡힌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무대에 나온다. 여행가방에 구겨 넣기 편해서다.

어쨌든 남성 연주자들은 연미복 한벌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여성 연주자들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양팔과 어깨는 물론 가슴까지 과감히 노출한 디자인이나 화려한 색깔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연주복이라 유행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선택의 자유만큼이나 돈이 많이 든다.

국내 연주자들은 유달리 연주복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화려한 의상에다 연주까지 잘하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망감도 더욱 커진다. 낡고 유행에 뒤떨어진 연주복이라도 연주를 잘 하면 더 멋있어 보인다. 어디까지나 연주복은 연주자에게 '예복' 이 아니라 '작업복' 이기 때문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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