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밀레니엄 작가] 7. 터키출신 오르한 파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유럽과 아시아라는, 거대하고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에 낀 나라.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기 십상인 이같은 지정학적 위치는 터키 출신의 세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오르한 파묵 (47) 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건축학과를 중퇴하고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 첫번째 장편 '제브데크씨와 아들들' 이 79년 한 신문사 소설공모에 당선되면서 작가로서 탄탄한 이력을 시작한 파묵은 동양과 서양의 대비 속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한 85년작 '하얀 성' 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얀 성' 의 무대는 17세기. 베니스에서 나폴리로 여행하던 젊은 이탈리아 학자가 죄수로 붙잡혀 콘스탄티노플에 끌려온다.

그의 역할은 자신과 꼭 닮은 터키학자의 대역 노릇을 하는 동시에 그에게 서양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 그러나 아무리해도 귀동냥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꿔치기할 모의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으로서의 역할바꾸기는 파묵의 작품에서 낯익은 장치다.

파묵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예외없이 터키의 구체적인 역사나 일상의 삶을 탄탄한 밑그림으로 등장시킨다.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94년작 '새로운 인생' (민음사 펴냄) 이 밤낮없이 달리는 고속버스 속 풍경을 통해 서구문화와 토착문화가 갈등을 빚는 터키 현실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 한 예다.

터키풍 소재로 지극히 서구적인 주제를 요리한 그의 소설에는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비판도 일곤하지만, '새로운 인생' 은 터키 국내에서도 사상 최다판매부수를 기록하는 인기를 누렸다.

"어느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인생' 은 주인공이 자신을 매료시킨 책 속의 인생을 찾아가는 이상스런 여정이다.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주인공이 왜 매료당했는지 따위의 고전적인 설명은 조금도 없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면서 구체적인 부분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두는 것 역시 파묵의 특징이다.

정체성이라는 세기말 인간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화두 삼은 그의 소설이 한결 강력한 보편성을 띠는 데는 이같은 전략의 힘도 작용했다.

지난해 12월 터키에서 출간된 최신작 '나의 이름은 빨강' 이 현재 8개국어로 번역중이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