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새내각 무늬만 '젊은 피'…실제 기득권 세력 장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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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개혁의 포장에 올리가르키 (과두 금융.산업 재벌) 를 담은 내각' .지난달 31일 러시아의 새 내각명단이 발표되자 크렘린 관측통들이 일제히 내놓은 분석이다.

실제로 새 내각은 나이나 성향으로 보아선 전임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내각과 비교해 확실히 친개혁적인 인물들이 많다.

나이도 젊어졌다.

그래서 개혁내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이 추진할 정책이나 권부의 역학관계까지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올리가르키들의 이익을 가장 잘 반영할 내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는 의견들이 많은 것이다.

이날 발표된 새 내각의 면면은 지난 10여일 동안 내각 구성권을 놓고 벌어졌던 치열한 내부투쟁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준다.

올리가르키들의 일방적 승리다.

올리가르키와 싸움을 벌였던 세르게이 스테파신 신임총리와 소장개혁파들은 무참히 패했다.

현지에서 발행되는 '코메르산트 데일리' 는 적어도 이번 내각구성 투쟁과정에선 스테파신 총리는 사실상 총리가 아니었고 옐친 대통령도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었다고까지 분석하고 있다.

그만큼 새 내각의 면면은 올리가르키들의 집단이익과 옐친의 딸 타티야나 디야첸코 및 그 추종세력들의 이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로써 올리가르키들은 ▶반 (反) 올리가르키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프리마코프 총리 내각의 해산 ▶크렘린 및 권부내에 친 (親) 올리가르키 인맥의 재구축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달성했다.

그동안 올리가르키들은 격렬히 투쟁해왔다.

프리마코프 내각이 국내산업 경쟁력 강화와 부패청산을 내걸고 올리가르키들이 대부분 소유한 부실 시중은행의 퇴출 및 합병, 산업구조조정 등을 단행하자 이에 맞섰던 것.

하지만 프리마코프는 국민들의 지지와 검찰의 수사권, 국세부의 세무조사권을 활용해 이들을 압박해 갔다.

심지어 옐친의 가족에게도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반격에 나선 올리가르키들은 옐친을 움직여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을 파면하려 했지만 이도 여의치 않았다.

의회가 검찰총장 해임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올리가르키들은 사정대상으로 거론되던 크렘린내 왕당파와 소장개혁파중 부패에 연루된 인물들과 연합했고 마침내 의회의 옐친 탄핵 시도를 계기로 프리마코프를 총리에서 해임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같은 연합도 잠깐. 한팀을 이뤘던 올리가르키와 왕당파, 개혁파들은 총리해임 이후 내각구성권을 놓고 다시 대립한다.

아나톨리 추바이스 전 제1부총리 그룹은 자신들이 주요 포스트를 맡아야 개혁이 완성되고 공산당정권 탄생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레조프스키 등 올리가르키들은 소장 개혁파들의 꼭두각시였던 세르게이 키리옌코 내각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옐친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하며 자신들이 주요 조각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추바이스 그룹을 패퇴시켰다.

이번 개각을 두고 전문가들은 크렘린내 '가족' (타티야나 디야첸코와 그 주변세력) 그룹이 개혁이라는 이념 (소장개혁파들) 보다 돈과 러시아 사회 내에서의 실질적인 힘 (올리가르키들) 을 선택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 올리가르키란

러시아의 과두 (寡頭) 금융 산업재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소수자에 의한 정치 지배에서 유래했다. 이전의 귀족정치와 다른 점은 부 (富)가 권력 획득의 결정적 조건이라는 것.

◇베레조프스키는 누구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53) 는 러시아 올리가르키의 대표적 인물이다.

'러시아를 움직이는 다섯번째 권부 (權府)' '사리사욕만 챙기는 2중 국적자' '소련 멸망으로 가장 혜택을 본 사람' '러시아 자본주의의 상징' 등의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소련 해체라는 혼란과 사유화과정에 재빨리 적응해 급속히 성장했다.

89년 러 최고의 자동차그룹 '아프토바즈' 사 사장을 움직여 '로고바즈' 라는 자동차 딜러 회사를 만들어 떼돈을 벌었다.

사유화 절차를 밟던 주요 업체들의 지배권을 확보했고, 국영방송 ORT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를 장악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에로플로트사 항공사, 시브네프트 등 거대회사의 지배권도 확보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주요 각료 임명시 국익보다 올리가르키들의 이익을 대변할 인물들을 천거해 관철시킨다는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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