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 발레로 도약하는 25세 ‘국민 발레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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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05면

국립발레단과 한국 발레의 두 축을 이루는 유니버설발레단(UBC)이 올해 창단 25주년을 맞았다. 올 문화예술계엔 25세가 된 ‘청년’ 둘이 돋보이는데 UBC 외에 다른 하나는 독보적인 문화예술 전문지로 자리 잡은 월간 ‘객석’이다. 배우 윤석화씨가 예음문화재단으로부터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

굴곡이 있던 월간 객석과 달리 UBC의 25년은 겉보기엔 비단길을 달려온 것 같다. 1984년 유력한 종교재단의 후원으로 설립돼 명실상부한 실세인 문훈숙 단장이 수석무용수에서 경영주로 변신해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잡음 없는 운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발레 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그 길은 비단길이 아닌 고난의 행군에 가까웠다. 발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가 워낙 낮다 보니 하나하나 가르치며 동행해야 하는 고역의 나날이었다. 그 결과 UBC는 ‘국민발레단’임을 스스로 내세울 정도의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올해 이 발레단이 준비한 레퍼토리를 보면 그 집념과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즌 첫 작품이었던 ‘돈키호테’를 비롯해 ‘라바야데르’ ‘춘향’ ‘오네긴’ ‘호두까기 인형’ 등 다섯 작품이 25주년 차림상을 수놓았다. 그 차림상은 성찬에 가깝다. 클래식 발레(‘돈키호테’ ‘라바야데르’ ‘호두까기 인형’)와 창작 발레(‘춘향’), 드라마틱 발레(‘오네긴’)까지 발레 역사 100년을 통시적으로 개괄하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발레의 젖줄이라는 유럽의 명문 발레단 레퍼토리도 이런 구성은 쉽지 않다.

지난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오네긴’(9월 11~20일)은 역사 기행의 중간에 위치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중·후반 서양 발레가 클래식에서 모던 발레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클래식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법고창신’한, 이른바 ‘드라마틱 발레’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낳은 월드스타 강수진이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1960년대 걸출한 안무가의 입성으로 일대 전기를 맡는다. 그가 45세로 요절한 안무가 존 크랑코다. 남아프리카 태생의 크랑코는 영국의 명문 새들러스 웰즈와 로열발레에서 안무를 배운 뒤 1961년 슈투트가르트에 둥지를 튼다.

‘오네긴’은 그의 입성 4년 뒤에 나온 작품인데, 앞서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1962)과 함께 드라마틱 발레의 명작으로 칭송을 받으며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을 일약 세계적인 명문 발레단으로 도약시켰다. 강수진은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진 못했으나 여전히 그 그늘 속에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작가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레로 만든 ‘오네긴’은 먼저 한 편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막이 열리면 대여섯 그루의 자작나무가 매우 ‘시적인’ 조명을 받은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꼿꼿이 서 있다. 그 앞에 여주인공 타티아나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최소의 장식으로 무대를 구성한 토마스 미카의 미니멀리즘 무대는 한 편의 정물화였다. 액자무대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발레는 더 이상 회화일 수 없다는 듯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실려 격정과 배신, 후회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질주를 거듭했다. 이지적이며 오만한 ‘바이런적인 영웅(byronic hero, 완벽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소유한 인물)’ 오네긴은 그 파란의 주인공이지만, 결국 그 파란의 피해자로 가엾게 우리 앞에 섰다. 발레가 극적이라는 의미는, 무용이 연극적인 기법을 도입했다는 말이다.

제인 본이 연출한 ‘오네긴’은 그런 특징을 매우 전형적으로 수용했다. 클래식발레가 특징적으로 과시하는 장식적인 장면, 이를테면 ‘그랑파드되’(남녀 주인공이 기교를 과시하는 2인무)와 ‘디베르티스망’(눈요깃거리로 등장하는 화려한 춤 장면) 등 이야기 전개와 별로 상관없는 것은 걷어 내고, 그사이를 연극적인 볼거리가 메웠다.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뒤바뀐 처지를 재현한 1막과 3막의 리얼한 ‘편지 찢는 장면’은 ‘근엄한’ 클래식이라면 상상 못할 일이다.

바로 그 점, 드라마틱발레로서 ‘오네긴’은 UBC엔 엄청난 도전과 공부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오네긴 역을 맡은 슈투트가르트 수석무용수 출신 이발 질 오르테가와 타티아나 역의 강예나는 그걸 표현하기에 매우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UBC는 ‘오네긴’을 통해 이제 다른 경지로 접어들고 있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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