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오늘도 걷는다』 펴낸 고은씨…시인·민주투사로 걸어온 길 돌아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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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연작 시집 『만인보』 탈고 소식이 들린 지 두 달 만이다. 고은(76·사진) 시인이 새 산문집 『오늘도 걷는다』(신원문화사)를 최근 펴냈다. 하버드대 등 외국 대학에서의 강연 원고, 각종 사보·잡지 등에 썼던 짧은 글 30여 편을 모은 것이다. 산문집은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니다. 시인 특유의 시론(詩論)은 물론 등단작인 ‘폐결핵’을 쓴 배경, 권위주의 정권 시절 네 차례 투옥 경험 등 시인이자 ‘민주 투사’로서의 이력을 소상하게 밝혀놓았다. 그의 문학세계와 통일관 등을 파악하는 데 이보다 나은 안내서는 없지 싶다.

가을볕이 따갑던 13일 오후 경기도 안성, 시인의 집을 찾았다. 시인은 대문 밖까지 나와 서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인보』를 끝낸 소감부터 물었다. 1986년 쓰기 시작한 『만인보』는 고향 마을 머슴 ‘대길이’부터 지난달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시인이 겪었던 30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시 한 편에 한 사람씩 그려져 있다.

알려진 대로 시인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돼 육군교도소에 수감됐던 80년대 초 구상했다. 현재 26권까지 나와 있다. 이번에 탈고한 원고는 마지막 4권 분량이다. 별권인 ‘서평·인명 색인’과 함께 내년 봄 출간된다. 시인이 굴곡 많은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만인보』는 ‘인물로 본 한국 현대사’라 할 만하다.

시인은 “백치라도 된 것처럼 한동안 멍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하지만 대장정을 끝난 감회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벌써 관심이 옮겨간 듯했다. 그는 “『만인보』는 서사시 『백두산』전 7권과 함께 감옥에서 살아나갈 경우 쓰기로 결심했던 세 가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시인은 남은 한가지, 심청에 관한 작품을 쓰기 위해 요즘 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제목은 ‘처녀’로 정해두었다. 시인은 “시·소설 등 여러 장르가 뒤섞인 작품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시인에게는 요즘 시가 쏟아진다. “혼자 있으면 머리 위로 뭔가 삐죽삐죽 솟는다. 어제도 나오고 그제도 나왔다. 거기다 뭘 붙여서 시를 만든다”고 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프리랜서 이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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