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경협 받으면서 핵은 시간 끌어 기정사실화 하려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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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명박 대통령 대북정책의 화두는 ‘북한의 진정성’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정책의 방향이나 수위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은 16일 언론 회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대통령은 “현재로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진정성이나 징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도발에 대한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의 불신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몇몇 지엽적인 대남 유화조치만으로 유야무야할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 대통령이 “(대북 제재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를 탈출하기 위해 다소 대미·대남·대일 유화책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 건 북한의 변화가 전술적인 차원에 불과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나아가 지난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북핵 포기에 대한 강력한 뜻도 드러냈다. “6자회담 회원국들이 합심해 북한 핵을 포기시키려는 노력을 가중해야 한다”는 대목은 향후 남북관계는 물론 미·일과의 대북정책 공조에서 북핵 문제가 중심에 자리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런 생각은 이미 북한 당국에도 전달된 것이란 게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지난달 북한 조문단 접견 때 “미국과는 북핵 문제를 논의하고, 우리와는 경협문제만 다루려 한다면 오산이며 이를 김 위원장에게도 꼭 전달하라”는 취지의 메시지가 김기남 노동당 비서에게 쥐여졌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이 회견에서 “북한이 아직도 경제협력을 받으면서 핵 문제는 그냥 시간을 끌어서 기정사실화하려는 목표가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다소 강한 어조로 비쳐지는 언급의 배경에는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일 등 국제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다는 정부 안팎의 인식이 깔려있다. 최근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보유를 언급하며 남한의 대북 강경노선에 반발하는 상황에서 북·미 간 양자대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북 접근법을 고수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과거에도 유엔을 통해 많은 제재를 했지만 이번이 가장 강력한 조치이고, 또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 대통령의 언급이 향후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풀이한다. 또 북한에 대해 구체적이고 진전된 조치를 보여달라고 촉구하는 뜻도 담겼다고 본다. 부당하게 억류했던 개성공단 근로자나 납북 어선을 풀어주면서 생색내는 걸 북한의 태도 변화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다. 정부가 공식 사과를 요구한 임진강 무단방류 사태에 대해 향후 북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하는 게 북한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할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 핵심 당국자는 “개성공단 임금 네 배 인상에 토지사용료 5억 달러를 요구하던 북한이 최근 임금 5% 인상으로 굽히고 들어온 건 우리 대북정책의 일관성과 원칙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 위원장이 북핵 포기 의지 등을 보여줄 ‘진정성’ 있는 결단을 내놓지 않는 한 이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에 변화를 가져오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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