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 나는 나다, 그러니까 더 사이좋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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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총리 후보자의 홈페이지 (www.hatoyama.gr.jp).

8·30 총선에서 일본 정치사의 새 장을 연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그는 ‘유려한 글’로 사회와 소통하는 정치인이다. 그의 홈페이지(www.hatoyama.gr.jp)엔 그가 쓴 연설문과 기고문이 가득하다. 최근 올린 글 ‘나의 정치철학’ 에는 하토야마가 구상하는 일본의 미래와 꿈이 강건한 문체로 담겨 있다. 영어와 한국어로도 번역해 소개해 놓았다. 1만2000자가 넘는 장문이다. ‘나의 정치철학’을 요약한다.
정리=김수정 기자 sujeong@joongang.co.kr

나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1954~56년 총리 역임)는 유럽 통합 운동의 주창자인 쿠덴호프 칼레르기의 책 『전체주의 국가 대(對) 인간』을 『자유와 인생』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 이 책은 “인간은 목적이며 수단은 아니다. 국가는 수단이며 목적은 아니다”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자유와 평등은 중요하지만 둘 다 근본주의에 빠지면 그것이 초래하는 참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침해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필요한데, 칼레르기는 그것을 ‘우애’에서 찾았다. ‘우애 혁명’은 혁명적인 기치를 수반한 전투적 개념으로, 칼레르기가 동시대에 직면한 좌우 전체주의와의 싸움을 지탱한 힘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자립과 공생의 시대
나의 조부 이치로는 당시 기세를 더해 가는 사회당과 공산당 양당에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료파 요시다 정권을 타도해 당료파 하토야마 정권을 수립하는 기치로서 ‘우애’를 내걸었다. ‘우애’ 이념은 전후 보수 정당의 본류로서, 고도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기초가 되었다. “인간은 그 존재가 고귀한 것이어서 항상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결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65년 작성된 ‘자민당 기본헌장’의 강령 제1장의 내용이다.

나는 냉전이 끝났을 때 고도성장만을 떠받쳐 온 자민당의 역사적 역할이 끝나고 새로운 책임세력이 필요함을 통감했다. 그래서 조부가 만든 자민당을 탈당했다. 96년 민주당 창당 선언에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유는 약육강식의 방만에 빠지기 쉽고, 평등은 ‘튀어나온 못은 정을 맞는다’는 식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 근대국가는 인간을 ‘한 무더기(mass)’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개인의 자립’이 존중돼야 하고, 동시에 ‘타인과 공생’하는 원리가 중시돼야 한다. 자립과 공생의 원리는 일본 사회 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 세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똑같이 관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너, 나는 나다. 그러니까 더 사이 좋게 지내자란 말도 있다.”

나는 전체주의 국가의 종언을 지켜보면서 ‘우애’를 ‘자립과 공생의 원리’로 재정의했다. 나에게 우애는 정치의 방향을 판단하는 나침반이며, 정책 결정의 판단 기준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인 ‘자립과 공생의 시대’를 지지하는 시대정신이라고도 믿는다.

앞으로 정치의 책임은 사람과 사람의 유대를 재생하고, 복지·의료제도를 재구축하며, 빈부격차를 시정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정돈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공(公)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을회의 활동이나 비영리기구(NPO) 활동, 시민의 활동이 이에 속한다. 그들의 활동은 국내총생산(GDP)으로는 환산되지 않지만 그 활동의 층이 얼마나 두터우냐가 풍족한 사회를 건설하는 관건이다.

중앙집권 대신 지역주권국가 확립해야
나는 ‘중앙집권국가’인 지금의 일본을 ‘지역 주권의 국가’로 변혁하고자 한다. 작은 중앙정부, 작은 국회, 그리고 큰 권한을 가진 효율적인 지방정부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지방분권 주권국가다. 기초자치단체, 광역지자체가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외교·방위·거시경제 정책 결정 같은 것만 중앙정부가 담당하고 통화 발행권 등 국가 주권의 일부는 유럽연합(EU)과 같은 국제기구에 이양하는 것이다. 기초지자체에 재원과 권한을 더 큰 폭으로 넘겨 서비스해야 할 것과 부담해야 할 것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면 각 지역은 자주성과 자기책임, 자기 결정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개성적이면서도 매력 넘치는 아름다운 일본 열도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역 주권국가’의 확립은 ‘우애’의 현대적 정책표현이며 미래 시대의 정치 목표다.

패권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분투하는 미국과, 패권국가가 되려고 시도하는 중국의 틈에서 일본은 어떻게 정치·경제적 자립을 유지하며 국익을 지켜갈 것인가. 지역 안정을 위해 미국의 군사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면서도 미국의 정치·경제적 방종은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 중국의 군사적 위협은 감소시키면서도 거대해진 경제활동의 질서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이 지역 모든 국가의 본능적인 요청일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글로벌리즘이라고 하는 초국가적인 정치·경제이념이 좌절된 지금, 민족주의가 다시 여러 국가의 정책결정을 크게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몇년 전 발생한 중국의 반일(反日) 폭동이 상징하듯 인터넷의 보급은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을 가속화하고 있다. 때로는 제어 불능의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인식 아래 우리는 새로운 국제협력 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각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극복하면서 경제협력과 안전보장의 규칙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군사력 증강, 영토 문제는 일·중, 한·일 등 양국 간 교섭으론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두 나라가 서로 이야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쌍방의 국민 감정을 자극해 결국 민족주의 감정의 격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역적 통합을 저해하고 있는 문제는 실은 지역적 통합의 폭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만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에 서 있다. 지역적 통합이 영토 문제를 풍화(風化)시킨 EU의 경험이 분명한 사례다. 이런 방향에서 ‘아시아 공통 통화’를 실현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10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정치적인 통합은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돌아가야 할 장기적인 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할수록 정치는 높고 큰 목표를 내걸고 국민을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세계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 국내 경기대책을 세우는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새로운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결의하고 구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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