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니 前주한미국대사 특별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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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임스 레이니 미 에모리대 총장 (전 주한미국대사) 이 크리스챤 아카데미 초청으로 방한, 오재식 월드비전 (구 선명회) 회장과 한반도 주변정세와 미국의 정책방향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레이니 총장은 대담에서 5월말 발표될 예정인 페리 보고서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보다 적극적인 개방 유도형으로 바꾸는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며, 보고서에는 북한의 미국내 자산동결 해제는 물론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기 위한 외국인투자 유치와 장기차관 제공 등 경제제재 완화방안이 다수 포함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한반도 주변정세 안정을 위해 4자회담보다 일본.러시아를 포함한 6자회담이 필요하며 페리보고서에 6자회담의 필요성이 지적되면 미국은 곧바로 6자회담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레이니 총장은 대사재임 시절인 94년 북한 핵위기를 타결하기 위해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파견하는 아이디어를 내 위기국면을 넘겼으며 이후 4자회담 성사의 주역으로 활동한 비둘기파. 퇴임후에도 미국 외교협회 (CFR) 한반도프로젝트 팀장으로 한반도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클린턴대통령에게 페리 대북조정관 임명을 건의한 당사자이기에 페리 보고서와 관련된 발언은 보고서의 내용을 상당히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

▶오 =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레이니 = 金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오랜 남북관계의 관행을 깨뜨린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됩니다.

金대통령은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아가 민간부문의 남북교류를 정부차원의 교류와 연계시키지 않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해 교착상태인 남북관계를 한단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정치적으로 위험이 적지 않죠. 왜냐하면 북한이라는 나라가 매우 예측불가능한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金대통령의 시도는 정치적 용기로 높이 평가됩니다.

▶오 = 미국내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강경파들은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에 대해 회의적이지 않습니까.

▶레이니 =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는 등 도발적인 행동을 한 데 대해 많은 분노를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공화당이 믿을 만한 인물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 페리 보고서가 상당히 주목됩니다. 미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인데요.

▶레이니 = 클린턴 대통령은 지금까지 의회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대북정책에 차질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페리 보고서가 나오면 공화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페리 보고서가 대북관계를 상당히 진전시키리라 기대가 됩니다. 최근 금창리 문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타결의 실마리를 찾으면서 미국내에서는 보수강경파를 포함해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은 물론이고 외국인 투자나 장기차관의 제공을 가능케 하도록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나아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평화회담을 열자는 제안 등이죠. 이런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자는 내용의 제안들이 페리 보고서에 담기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 = 일부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북한의 태도에 따라 최악의 경우 군사적인 행동까지 거론되고 있다는데요.

▶레이니 = 보고서를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북한이 우리의 전향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계속한다면 불이익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북한이 외부세계로부터 얻고 있는 특별한 이익이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북한에 불이익을 주기 위해 거둬들일 이익이 없는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불이익을 준다는 것은 군사적인 행동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은 북한이 포용정책에 부응, 외부세계와 다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북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죠.

▶오 =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자면 인내와 확신이 필요한데 미국은 국내외의 압력 속에서 이런 기조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레이니 = 미국은 대북정책에서 인내심을 보여왔고, 지금까지 좋은 결과를 맺어왔습니다. 냉전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얼음이 녹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북한을 이상한 집단으로 몰아붙여서는 안됩니다. 현재 북한의 상황은 매우 열악합니다.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죠.

그들 나름의 생존전략이 로켓개발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임을 감안할 때 햇볕정책과 같은 것은 결코 나이브한 발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정책이죠. 북한이 처한 극한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그들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나이브한 것이며, 그 결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 = 4자회담을 만든 주역으로서 앞으로의 전망을 해본다면.

▶레이니 = 4자회담은 아무 전제조건 없이 만나서 털어놓고 얘기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중국은 매우 소극적이고, 북한도 4자회담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4자회담의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4자회담을 보면서 얻은 교훈은 지역협의체가 꼭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더 바람직한 것은 일본과 러시아까지 포함한 6자회담입니다. 페리 보고서에서 이런 방향으로의 광범한 제안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경우 미국은 곧바로 6자회담을 추진할 것입니다.

▶오 = 6자회담이 될 경우 일본의 발언권이나 역할이 커지겠군요.

▶레이니 = 일본에서는 이미 더 이상 미국에 종속적일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열도를 통과한 이후에는 군사력 강화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죠.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에 현재와 같은 정치.외교적 지위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이 동북아 지역 안정을 위해 역할과 목소리를 높이는 방안을 같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반드시 군사력강화를 수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중국을 긴장시켜 군비경쟁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오 = 최근 코소보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얘기를 합니다. 북한이 계속 도발적인 행위를 할 경우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폭격을 할까요.

▶레이니 = 발칸과 한반도는 다릅니다. 발칸에서 미국은 오랫동안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실패했으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소수민족의 말살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기에 여러나라의 동의를 얻어 함께 참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막강한 재래식 화력을 가지고 있고, 무력시위는 엄청난 희생을 초래할 것입니다. 이미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공격가능성을 여러 차례 부인해 왔습니다. 지금은 북한의 생존권을 존중하고,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레이니 총장은…

레이니 총장은 클린턴과 같은 아칸소주 출신으로 93년 클린턴 정부 출범과 함께 주한대사로 임명돼 97년까지 근무했다.

카터 대통령 시절부터 대사물망에 오를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은 감리교 신학자. 47년 주한미군에 근무했으며 당시 전쟁발발 가능성을 예고하는 리포트를 냈다.

귀국후 예일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59년부터 다시 한국에 와 연세대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이 시절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재야인사들과 교분을 넓혔다.

◇ 오재식 회장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원로. 60년 기독교학생회협의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사업에 뛰어들어 국내외를 오가며 40년간 외길을 걸어왔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CA) 와 세계교회협의회 (WCC) 개발국장 등을 역임. 97년부터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회장을 맡아 북한을 포함한 전세계 난민구호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리 =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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