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가볍게 처신 마라" 신의장 "대통령 뜻 따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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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거취 결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18일 오전 있을 이른바 '천.신.정 대표자 회의'에서 이뤄진다. 천.신.정은 열린우리당의 당권파 세력인 천정배 원내대표, 신기남 당의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뜻한다.

17일 오후까지 '의장직 사퇴 불가'였던 여권 핵심부의 입장은 이날 저녁 '사퇴 불가피'쪽으로 급변했다. 다만 사퇴 시기는 유동적이다.

신 의장의 아버지 신상묵씨가 일제 때 헌병 오장(伍長.하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군조(軍曹.중사) 시절 한국인을 고문했다는 추가 사실이 잇따라 폭로된 게 분위기를 바꿨다.

신 의장은 추가 폭로를 접한 뒤 국회 의원회관 7층 자기 방에서 참모진과 대책을 논의했다. 청와대와 휴가 중인 정 장관, 천 원내대표 측과의 분주한 연락이 거듭됐다. 사퇴냐, 버티기냐를 놓고 격론도 벌어졌다. 결국 18일로 잡혀 있던 대구.경북 방문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

그때부터 신 의장 주변에선 그가 사퇴 수순을 밟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연좌제는 안 된다'는 천정배 원내대표 등 여권 핵심들의 신 의장 옹호 논리가, 법적으로는 타당하더라도 정치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데 역부족이란 반대 측 주장에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사퇴할 경우 당내 권력질서가 순식간에 헝클어질 수 있기에 적절한 절차를 밟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고 한다.

오후 9시가 돼 방을 나선 신 의장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기자가 무슨 질문을 해도 "식사하러 가겠다"는 말 외엔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시각,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은 "당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청와대의 기본 입장"이라며 신 의장의 거취 문제에 함구했다.

신기남 의장은 이날 아침 있었던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내용을 곱씹고 있었다. 지역행사차 머물던 울산에서 잠을 깬 신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노 대통령="개인적으로 고통스럽겠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처신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신 의장="어떤 경우에도 대통령 뜻을 거스르는 결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는 그게 전부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통령의 통화는 짤막했다. 이날 낮 여권의 고위관계자가 전한 내용이다.

신 의장은 노 대통령과 통화한 뒤 바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로 출연했다. "현재로서 거취를 표명할 단계는 아니다. 국민 여론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당원동지들의 뜻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처신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의장직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가볍게 처신하지 않겠다'는 신 의장의 말은 노 대통령이 당부한 표현과 일치했다. '의장직 일단 유지'라는 당시 신 의장의 입장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여권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 의장을 여론의 비난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친일 문제를 규명하는 중심을 세우는 게 더 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신 의장도 친일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으니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 의장이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친일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극대화될 때가 신의장의 사퇴 시점이 될 것이란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런데 친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이날 저녁 신 의장 부친의 고문 문제가 불거지면서 최고조로 달하게 됐다. 그렇다면 신 의장이 자리를 유지하는 시간이 더 이상 길어질 필요가 없다. 신 의장이 물러나면 한나라당의 과거사 문제를 향한 여권의 공세가 강화될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수호.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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