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그녀 앞에선 누구나 술술 털어놓는다, 카스트로도 그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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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결론은 ‘사람’입니다. 사람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고, 얻는 게 가장 많습니다. 이번 주엔 각기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선 인물 두 사람의 자서전입니다. 언론인과 요리사로 분야는 딴판이지만 이들의 성공은 타고난 능력 덕분이 아니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눈물과 좌절,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재미와 교훈을 더불어 맛볼 수 있을 겁니다.

1977년 5월 19일 피그스만의 배 위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인터뷰하는 바버라 월터스. 당시 월터스는 45세, 카스트로는 51세였다. 아래 작은 사진은 1979년 영화배우인 존 웨인의 보트에서 그를 인터뷰하는 월터스(왼쪽)와 1992년 12월 애티카 교도소에서 존 레넌 살인범인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을 만나는 그녀. [프리뷰 제공]

그녀와 마주 앉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신분도 잊고 숨기고 있던 비밀 얘기나 부끄러운 고백까지 줄줄 털어놓는다. 베일에 싸여지낸 거물급 인사나 심지어 스캔들의 주인공, 세기의 살인자들도 “그녀라면…” 하고는 카메라 앞에 앉는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자신 앞에서 하도 눈물을 잘 흘려 방송 전에 그녀는 “제발 울음은 참아달라”고 당부할 정도다. ‘인터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바버라 월터스(77) 얘기다.

그녀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사임 후 그녀와 한 인터뷰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정적 증거인) 테이프를 태워버리지 않은 걸 후회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쿠바의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도 월터스에게는 꼼짝 못했다. 1975년 쿠바 방문 기자단의 일원으로 카스트로를 처음 만난 뒤 2년간 인터뷰 요청을 한 끝에 그녀는 77년 카스트로를 단독으로 만나 무려 다섯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그날 카스트로가 그녀에게 준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바버라에게, 내 평생 제일 힘들었던 인터뷰를 기억하며. 77년 5월 20일 새벽 1시 29분’.

이 책은 ‘인터뷰’로 점철된 삶을 산 월터스의 회고록이다. 1931년 9월 25일 생으로 곳 80세가 되는데도 지금까지 젊은 후배들과 섭외 경쟁을 벌이며 ‘단독 인터뷰’에 눈독들이는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을 집어들며 왜 책 제목을 오디션(원제 『Audition』)으로 했을까 궁금했다. 그녀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인생을 돌이켜보니 자신이 “긴 오디션을 한 번 받았다”는 기분이라고. “이 오디션을 통해 나는 남보다 뛰어나려고 애썼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책의 끄트머리에 “이제는 오디션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썼지만, 지난해 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췌장암에 걸린 ‘사랑과 영혼’의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를 직접 찾아가 첫 인터뷰를 따낸 것을 보면 ‘아직 배고픈 모양’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녀는 ‘오디션장’을 아직 떠나지 않았다.

월터스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한 일은 NBC의 자회사인 WNBT에서 보도자료를 쓰는 일이었다. 이후 NBC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며 낮시간대 뉴스 프로그램 ‘투데이 쇼’에 한 두 차례 출연하다가 고정 출연자로, 진행자로 자리를 잡았다. 76년 ABC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저녁뉴스 메인앵커가 되었고 ABC 방송 뉴스매거진 프로그램인 ‘20/20’을 25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의 진짜 재미는 역시 수 십년간 숱한 유명인사들과 인터뷰한 사연과 뒷이야기에 있다. 등장인물은 미국의 대통령들부터 사다트·옐친·고르바초프·차베스 등 수십명의 국가원수와 정치 지도자, 할리우드 스타들, 살인자들까지 다양하다. 그러기에 거의 800쪽에 달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도중에 화장실에 가는 일이 귀찮아질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녀는 최악의 인터뷰 대상자로 무엇을 물어도 딱 한마디씩만 답했던 영화배우 워런 비티를 꼽았고, 가장 자랑스러운 경험으로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 합동 인터뷰를 단독으로 성사시킨 것을 꼽았다. .

책 읽기 전엔 월터스가 늘어놓을 ‘나 잘났다’시리즈가 은근히 걱정됐지만 그건 기우였다. 책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뮤지컬 제작 등 연예 사업가로 평생 그녀의 동정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언니, 세 차례의 결혼, 입양한 딸 이야기는 물론 1970년대 흑인 상원의원 에드워드 W. 브루크가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불륜 관계를 맺은 이야기 등 치부까지 담담하게 털어놨다. 과장도 없고, 감상적이지 않되, 마주앉아 손잡고 들려주는 얘기처럼 친근하다.

월터스는 자신을 움직인 것이 ‘불안’이라고 했다. “아무리 내 이름이 알려지고 아무리 많은 상을 받 아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확인한 것은 그의 균형잡힌 감정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극심하게 좌절하지도, 크게 자만하지도 않았다. 그 ‘균형감각’을 무기로 만난 상대를 모두 친구로 만들며 기나긴 오디션을 통과해왔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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