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거짓말이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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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찬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둘째)와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右)이 17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 정책조정 회의에 앞서 얘기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과거사 정국에 '신기남 파문'이 돌출하자 여야의 처지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수세에 몰린 듯했던 한나라당은 즉각 역공을 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도 가세했다. 일단 열린우리당이 코너에 몰리는 형국이다.

그러나 여야의 속내는 복잡하다. 한나라당은 반격에 나서면서도 너무 깊숙이 이 문제에 빠져드는 데 부담을 느끼는 눈치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악재는 악재지만 위기는 아니란 인식이다. 오히려 정국을 친일 진상 규명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계산도 한다.

◇ 공격 수위 조절=17일 오전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 회의. 당 지도부는 열린우리당을 맹렬히 성토하면서도 수위를 조절하는 인상이었다.

김덕룡 원내대표는"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여당 지도부는 순백한 것처럼 행동했는데, 대통령 말대로 3대를 떵떵거린 친일집단이라는 게 드러났다"면서"(신 의장의)이중적 행동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형오 사무총장도"국민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들었다. 초점을 '신기남 의장 부친의 문제'(친일)가 아닌 '신 의장의 문제'(도덕성)에 맞췄다. 여권이 쳐놓은 과거사의 덫을 피해 신 의장을 공격한 셈이다.

아울러 한나라당은 과거 행적에 대한 단죄보다 과거사 캐기의 부당성을 부각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임태희 대변인은 "과거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과 가정, 기관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민생 경제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신 의장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전여옥 대변인)는 퇴진 반대론까지 나왔다. 선친 문제로 신 의장이 타격을 입을 경우 후폭풍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논란으로 번지고, 이는 박근혜 대표에게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 여당서 나오는 퇴진론=신 의장 퇴진론은 한나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에서 분출했다. 당권파로 분류되는 안영근 제1정책조정위원장은 이날 "이른 시일 내에 (신 의장이)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정도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다. 당원 게시판에는 "시간 끌지 말고 즉각 사퇴해 친일청산을 강력하게 추진할 명분을 만들어 달라"거나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부류의 글들이 쇄도했다. 신 의장을 밟고 가면서라도 과거사 규명에 탄력을 받게 하자는 주장이다. 여권 핵심부는 퇴진 불가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려 하지만 바닥 정서는 반대다.

물론 당 내부에선 "신 의장에게 극복할 기회를 줘야 한다"(문희상 의원)는 '정면 돌파론'도 나오고 있다. 선친의 친일 의혹이 제기된 신 의장이 친일 진상 규명에 앞장서면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오히려 과거사 규명 작업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다. 현재로선 '퇴진론'과 '정면 돌파론'이 팽팽한 형국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한나라당에 대한 강공 드라이브를 염두에 두고 있고, 궁극적으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 "거짓말에 책임져야"=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모두 복잡한 수 읽기에 빠져 있는 가운데 제3당인 민주노동당은 양당을 싸잡아 공격하고 나섰다. 박용진 대변인은 신 의장의 사퇴 유보 의사에 대해 "청와대의 뜻인지,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뜻인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며 "정치지도자가 거짓말을 한 것과, 자신과 소속 정당의 주장과 배치되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과거사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기고 민생 경제 회생에 전념하자"는 한나라당의 논리에 대해서도 반민특위를 좌절시켰던 친일수구세력들의 전형적 대응논리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신 의장 선친의 친일 문제를 보고 받고 "왜들 이렇게 가야 되는지…. 그쪽도 골치 아프게 됐네요"라고만 말했다고 전여옥 대변인이 전했다.

강민석.이가영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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