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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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6) 이게 바로 '내영화'

70년대 초반까지 그토록 무수한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알수 없는 조갈증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내 작품이냐" 며 끝없이 자문도 해 보았지만 그리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너나 할것 없이 자기 하는 일에 남이 간섭을 하면 하던 일도 멈추는 게 우리네 인지상정이다.

그런대도 그럭저럭 용케 참아내며 제작자들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런 괴로운 심사에 빠져 있던 73년 '잡초' 는 운명처럼 내게로 왔다.

감히 내가 '내 영화' 라고 부르고 싶은 첫번째 영화, 그게 바로 '잡초' 였다.

내 의지가 담긴 최초의 영화이고 내 리얼리즘의 첫번째 구현작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제작한 '잡초' 에는 장동휘.박노식.최무룡이 출연했다.

나한봉 각본으로 서정민 기사가 촬영했다.

버림받은 여인 분례 (김지미)가 대장장이를 만나 생애 처음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 부부로서 지냈던 짧은 세월도 잠시뿐. 그 대장장이는 전처 소생의 두 아이를 남기고 떠난다.

분례는 모성애로 그 아이들을 기른다.

한없이 고달픈 인생사를 감수하면서. 이게 '잡초' 의 내용이었다.

엄청난 주제도 아니었다.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일생을 다룬 이야기였다.

그건 내가 살아온 삶과도 흡사했고, 우리 어머니의 생과도 닮아 보였다.

나는 우선 거짓말을 덜 할 수 있는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면서 내 자신의 영화패턴을 바꿔나갈 결심을 했다.

이 영화는 입도선매식으로 제작이 이뤄졌다.

지방업자들까지도 먼저 끌어 대 부족한 제작비를 마련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잡초' 는 대한극장에 걸리는 행운을 얻었지만 흥행에는 참패였다.

어렵게 완성됐으니 직접 홍보에 적극 나섰어야 하는데도 나는 후속작 '증언' 을 찍는다고 지방을 떠돌고 있었으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돈보다도 훨씬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작품' 보다 '흥행' 을 우선한다는 꼬리표를 드디어 떼게 해준 것이다.

진지한 작품을 해낼 수 있는 감독임을 영화계에 인지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다음 작품 '증언' 은 전쟁영화였다.

신일룡.김창숙.김희라 등이 출연한 '증언' 은 여러모로 특기할만한 작품이다.

우선 제작비가 1억2천만원으로 당시 한국영화사상 첫 1억원대 영화로 기억된다.더욱이 영화진흥공사가 직접 제작한 국책영화로 해외영화제에 출품까지 했다.

'증언' 의 도입부에 나오는 한강다리 폭파장면과 비행기 폭격장면 등은 미니어처로 제작됐다.

이걸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일본 특수촬영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심지어 정식 작전명령을 받고 촬영에 협조했다.

나는 그 특수촬영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증언' 은 전쟁영화이면서 군인 (장소위) 의 시각이라기 보다는 피난가는 한 여인 (순이) 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게 특징이다.

6.25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 한국인이 겪은 가장 길었던 3개월간의 고통과 비극을 담아냈다.

내가 이런 시선으로 이 영화를 찍은 것은 아마 늘 전쟁을 있어서는 안될 대상으로 여겨온 내 무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워낙 대규모 물량을 투입한 영화라 흥행엔 성공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하고 진저리 나는 한국땅을 벗어날 수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74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증언' 이 출품되면서 잠시나마 이땅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가 외국공항에 내리자 한국말이 사라졌다.

영어.중국어.일어가 도처에서 들려왔는데 한국말은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우리나라가 이것밖에 안된단 말인가. " 나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야 내가 살고 있는 땅의 소중함에 눈뜨고 있었다.

"내가 이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지 않으면 어느 나라의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 이땅에 대한 그간의 혐오가 어느새 애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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