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서서] 더불어 사는 삶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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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 더불어 사는 삶 위해 새 천년엔 새 발상을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회한과 공포의 감정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한편으론 이는 지난 세기를 살아온 우리의 아둔함에 대한 회한이고, 다른 한편으론 살아가야 할 미래의 불투명성을 향한 공포일 것이다.

또 우리는 20세기가 가져다준 엄청난 생산력 발전과 인권신장에 한편으로 자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몰고 올 재앙들에 전율하고 있다.

핵전쟁 위험성, 환경오염, 경제의 세계화, 과학기술에 대한 통제력 상실, 기술발전이 더욱 가속화시킬 대량실업, 여성의 주변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홉스봄이 말하듯이 20세기는 '극단의 시대' 였다.

전 지구사회가 공동으로 직면한 문제들 외에도 우리는 대내적인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은 여전히 경제발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지역갈등이 아직도 정치에 이용되면서, 우리는 '미완성의 민족국가' 속에 살고 있는 게 상징적이다.

게다가 우리 근대사에서 국민 전체의 '근대적 규율화' 는 성공하지 못했고, 국민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사회적 신뢰는 결여돼 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택시요금을 속이는 운전기사와 물건값을 속이는 시장 상인들의 비열함으로 이 나라를 이해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행해지는 '공권력의 강제' 와 담쟁이 넝쿨처럼 질긴 '가족이기주의' 를 빼면 우리 사회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급박하게 닥쳐온 경제위기와 대량실업만이 아니라, 속고 속이는 전투적인 일상생활이 서민의 심신을 괴롭히고 있다.

컴퓨터.대중문화.소비에 탐닉하는 청소년층과 과학기술에 무지하고 전통을 강조하는 기성세대를 연결하는 어떤 교두보도 없다.

서구인이 부러워하는 가족제도의 공고함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이 급속한 문화혁명도 21세기의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21세기가 몰고 올 가공의 공포 앞에서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대한 우리 사회 엘리트들의 대답이 인간성 회복을 위해 감성과 영적인 세계를 회복하자거나, 근대성의 성과와 구조적 문제해결을 거부하는 포스트 모던적 해체주의나, 각자의 작은 세계 내에서 문화적 실천에 복무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날 때면, 이 또한 틀린 말이랄 수는 없지만, 어쩐지 이들이 역사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거세당한 것 같아 서글프다.

21세기의 벽두에 선 우리가 세계 경제체제의 복잡한 작동원리나 과학기술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초래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세기말의 한국이 겪는 위기에 대한 대처방식은 국가건 엘리트 집단이건 구태의연하다.

경쟁력이 없는 특정부분을 희생시키거나 혹은 능률성 제고에 대한 찬미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가 던지는 도전이 크면 클수록 대안사회의 모색을 위한 '발상의 전환' 이 절실해진다.

이 과정들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합의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사회에서 개인은 더욱 무력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나누고 적게 일하고 적게 소비하는 사회,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사회, 서민들이 강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양성 모두가 평등한 사회, 그리고 기술을 활용하면서 통제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신념과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 조건을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는 '부르메르 18일' (마르크스의 논문) 의 한 문장은 역사가인 나에게는 여전히 고무적이다.

20세기 벽두에 그랬던 것처럼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위대한 낙관이 필요하다.

인간은 구조적 강제에 종속되지만, 또한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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