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인의 역사학자가 쓴 '역사의 길목에 선…'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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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역사는 거울에 비유된다.

그 거울은 화장을 지우고 고치는 차원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상징 같은 것이다.

왜 개혁론자들에겐 '가지 않을 수 없는 고난의 길은 없다' 는 말이 그토록 절실하게 다가서는 걸까. 박종기 (국민대.국사학).박광용 (가톨릭대.국사학).이익주 (서울시립대.국사학) 교수 등 18인의 역사학자가 쓴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푸른역사.9천5백원) 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 중엽인 1135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묘청과 진압 총사령관이었던 김부식. 역사학자 신채호의 영향으로 우리는 이를 자주파/사대파의 대결로 간주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필자 채웅석 (가톨릭대.국사학과) 교수는 그런 이분법을 "외세작용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치" 라며 대신 "묘청은 풍수도참설을 바탕으로 비상한 제도개혁을 주장한 인물, 김부식은 유교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 개혁노선을 걸었던 인물" 로 재평가하고 있다.

개혁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기로는 정도전.이색.조광조 등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전은 한꺼번에 엄청난 물량의 개혁프로그램을 쏟아부었다가 결국 기득권의 반발에 부딪혔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필자 임용한 (협성대 강사) 씨는 정도전을 그나마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개혁가로 지목하고 있다.

도현철 (연세대 강사) 씨에 의하면 이색의 경우 정도전.조준 등과는 달리 온건개혁론에서 왕조재건론으로 갔다가 결국 망국대부 (亡國大夫) 로 남길 자처했다는 평. 조광조는 역부러 순탄한 훈구세력의 길을 피해 역경의 사림세력에 휩쓸렸다가 실패자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필자 오종록 (고려대 강사) 씨는 "끝내 조광조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도학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는 말로 '일부 성공자' 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고 있다.

여호규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 씨는 신라 김춘추가 642년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을 만났던 숙명적 사건이 동북아 통일구도를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했음을 주목한다.

훗날 연개소문.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악인과 성군, 또는 자주적 대외 투쟁가와 외세 의존적 음모가로 명암이 엇갈렸다.

같은 맥락에서 왕건.궁예.견훤.김구.여운형 등이 통일의 험한 길을 걸었던 인물로 등장한다.

역사적 중대국면에서 행위양식의 선택을 놓고서 타협/지조, 은둔/입신, 저술/투쟁의 양극단을 오가야 했던 지식인으로는 최치원.이규보.정약용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필자들의 역사인물 해석이 보수/진보로 뒤섞여 다소 혼란스러운 감도 없지 않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런 말들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거시적인 개혁론은 잠시 빛을 발했다가 곧 소멸하고 후대에 짐을 떠넘기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 " (협성대 강사 임용한씨가 정도전을 논하면서)

"개인의 개혁역량보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더 궁극적인 과제다.

" (고려대 강사 오종록씨가 조광조를 지적하면서)

"명청 (明淸) 교체기에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놓고 각 단계에서 유연하게 외교정책을 펼친 광해군을 오늘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 " (규장각 특별연구원 한명기씨의 견해)

그런데 역사해석이 아닌 실제 31인의 신념은 어떠했을까, 정녕 그것이 궁금하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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