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마의 삼각지대를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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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흔히 개혁을 구조조정과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개혁은 소유구조나 분배구조에 있어 배제된 계층 혹은 불이익을 받는 계층을 위한 불평등 구조 혁파조처를 말하는 것이며, 구조조정은 세계적

시장경제의 논리에 맞춰 경쟁에 알맞도록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극단으로 단순화하면 개혁은 노동자를 위해 자본 혹은 기업측을 일정하게 희생시키는 조치고, 구조조정은 기업경쟁력을 위해 노동자가 일정하게 희생을 하는 조처다.

물론 잘하면 구조조정이 개혁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오히려 반 (反) 개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것은 개혁이라기보다 구조조정이며, 그것도 IMF조건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그 핵심적 내용은 정리해고다.

따라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실업자가 증가한다.

더구나 IMF의 초기 정책실패 (긴축재정과 고금리) 로 인한 실업증가에 이어,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증가는 마침내 실업자 홍수를 가져왔다.

완전 실업자 2백만명, 반 (半) 실업자를 합하면 3백만명이 넘는 대량실업을 한국같이 취약한 사회가 감당할 수 없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달리 외환위기 해결을 위해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제 실업문제가 최대의 현안이 됐고 실업자 흡수를 위해 경기진흥정책을 쓰게 되고, 경기진흥정책을 쓰면 구조조정은 후퇴하게 마련이다.

세계은행 스티글리츠 부총재의 말처럼 실업자수는 구조조정에 대한 자동차의 기어와 같은 것이다.

실업자수가 늘어나면 기어를 당겨 구조조정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정부는 경기진작을 위해 재정적자를 늘리고 화폐 발행액을 높이며, 소비를 부추긴다.

공공투자정책을 쓰고 주택경기를 활성화한다.

그렇게 되면 마이크로면에서나 매크로면에서나 구조조정은 지연되고 점차 물건너가게 된다.

이리하여 개혁을 하면 구조조정이 안되고, 구조조정을 하면 실업이 늘고, 실업자 흡수를 위한 경기정책을 쓰면 구조조정이 안된다.

마 (魔) 의 삼각지대에 빠진 것이다.

마의 삼각지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정부는 무엇보다 외국의 직접투자를 가뭄의 단비처럼 학수고대하고 있다.

사실 정리해고의 효과도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곳이 되면 외국의 직접투자가 늘 것이고 외국기업이 실업자들을 흡수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직접투자는 제조업 부문에 단비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애타게 뿌리다가 말거나 단기 투기자본의 형태로, 주로 서비스 분야에 폭풍우를 동반하고 오거나 농작물에 피해가 많은 산성비처럼 오고 있다.

지난해 외환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상반기에 15건 (54억달러) 이 들어온 후 하반기에는 3건 (11억달러) 으로 줄어들었고, 최근에 팔아 넘긴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실상 몇조원을 끼워주고 판꼴이 됐다.

뿐만 아니라 이미 외국기업의 시장독점이 강화되고 있고 증권시장에서 세계최고의 폭리를 얻고 있다.

외자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와 달리 한국경제의 안방을 차지하고 우리를 행랑채로 몰아낼 형국이고 보니 바로 핀란드가 빠졌던 IMF 2년차 함정과 멕시코가 빠졌던 IMF 3~4년차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현재로서는 영국모델의 적용도 무리다.

정부는 구조조정과정에서 은행부채를 비롯한 부채의 상당부분을 떠안게 됨에 따라 공공부채비율이 올해말까지 국내총생산 (GDP) 의 80%를 넘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새로운 위기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도이체방크의 경고가 나와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다시 부동산 쪽으로 돈이 몰리면서 사치품 수요가 증가하고 소비의 이중구조가 심화되고 있다.

진정한 개혁에서 멀어지면 노동자와 실업자의 반발이 커지고 사회적 신뢰는 파괴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혁과 구조조정과 경기진작간의 마의 삼각지대를 피하려다 보면 다시 외자의 횡포, 공공부채 누적, 그리고 사회적 컨센서스의 파괴라는 또 다른 마의 삼각지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IMF체제 극복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 위기 속에 진정한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길을 찾으려는 진정한 자세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김영호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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