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중단하는 정범구씨가 읽은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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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KBS2 '정범구의 세상 읽기' 를 통해 TV 토크 쇼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듣는 시사평론가 정범구 (45) 씨. 정씨는 노변정담.신변잡담 수준에 그쳤던 토크 쇼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계 리더들을 불러내 우리 시대 현안들을 밀도있게 파고들었다.

특히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백낙청 '창작과 비평' 발행인, 시인 박노해.김지하 등 좀처럼 TV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진보적 지식인을 초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재충전을 위해 다음달 6개월 예정으로 독일로 떠나는 그를 만나 '시사토크쇼 진행자 정범구를 통한 세상읽기' 를 시도했다.

"한국 정치는 직설의 문화가 약해요. " 정씨는 무엇보다 정치계에 가슴을 열고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풍토가 부족한 현실을 아쉬워했다.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계산한 다음 원론적인 답변에 그쳐버리니 재미가 없고 청중들에게도 진실을 전달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올초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연속 초청해 "당내 리더십이 약하지 않느냐" 는 공통질문을 던졌더니 불쾌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

"신문 정치면 가십이나 해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왜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지 못하는지…. 독일을 보세요. 정치인 토크쇼가 얼마나 리얼합니까. 스캔들까지 들쑤십니다. 금기사항이란 있을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열려있죠. " 다른 지식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제3자적 시각의 비판은 수용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맞대고 질문하면 곤란해한다는 것. 특히 관료들이 토론에 취약하다고 꼬집었다. 정치인은 선거를 의식해서인지 그래도 출연하지만 일반관료들은 얼굴 자체를 보이길 꺼려한다는 것.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식으로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것 같습니다. " 예컨대 지난주 한.일 어업협정에 대한 당국의 의견을 들으려 외교통상부와 해양수산부 장관의 출연을 교섭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고. 결국 어민대표와 전공교수만 나오는 반쪽 토론에 그치고 말았는데 방송 후 다른 통로를 통해 불만을 표시해 당황했다고 덧붙인다.

"토론의 목표는 자기와 다른 생각과 관심을 인식하는 훈련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대한 상호인정, 다른 것과의 공존이 바로 민주주의의 출발이죠. 우리의 법제도는 제법 민주화했지만 다양성을 포용하는 토론문화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정씨는 우리 시대의 위기는 사람.제도의 위기가 아니라 실천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고질적 부정부패.연고주의 등을 풀어나갈 '법치주의' 라는 손쉬운 길은 이미 주어져 있는데 실천의 측면에선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정씨는 현 정부에도 의식.제도 개혁 같은 추상적 담론보다 국민들의 실천을 권장하는 실천강령, 즉 구체적 행동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버스를 타보세요. 운전석 옆에 걸린 '나는 난폭운전을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는 표어를 보셨겠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정답만 반복해 읽어왔습니다. 의식.도덕의 설교가 아닌 생활습관을 바꿔나가는 것이 진정한 문화혁명입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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