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5'無'의 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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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일어업협상에서 저지른 정부의 실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 사항에 한 해에 수천억원이 왔다갔다 하는 실수들이다.

그래도 관리들은 그저 '빠뜨렸다' 느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느니 하는 초보적인 설명 뿐이다.

꼭 준비물을 빠뜨리고 학교에 온 초등학교 입학생 수준 아닌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한국측의 실수를 접하면서 킥킥 웃고 있을 일본측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나라꼴을 이렇게 말이 아니게 만든 실수도 실수지만 수습책의 내용은 더 어이가 없다.

해양수산부장관이 "일본 농수산상과 직접 만나 쌍끌이 조업에 대한 추가 어획쿼터를 확보한 뒤 사임하겠다" 고 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럴 수 있는 근거가 걸작이었다.

"나카가와 쇼이치 (中川昭一) 농수산상과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 라는 것이다.

국가간의 협상을, 더구나 제로섬의 결과가 빚어질 수밖에 없는 협상을 '형님, 아우' 사이여서 해결할 수 있다니 인간적이고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어찌 해양수산부만이겠는가.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 발표나 보건복지부의 졸속 국민연금 확대실시 등등 곳곳에서 무지.무능.무관심.무책임.무의욕 등 '무 (無)' 가 속속 감지되고 있다.

한 나라 어문정책의 바탕과 뿌리가 되는 사안을 아닌 밤중 홍두깨식으로 불쑥 내밀고 강행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소득 파악이 전제가 돼야 실시할 수 있는 국민연금제를 소득파악도 제대로 않고 실시부터 서두르는 행정을 우리 말고 또 누가 할 것인가.

지난 달 22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권위주의 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 고 내각을 질타했다는데 정말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게 관료사회다.

최근 이런 개인적인 경험도 했다.

설 이틀전 날인데 서울 시경 강남면허시험장에서 우편물이 날아 들었다.

5년마다 하게 돼 있는 적성검사를 받지 않아 운전면허를 취소했다는 느닷없는 통고였다.

언제 적성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했던가.

도로교통법 (제74조 4항) 은 분명히 '적성검사를 하고자 하는 때에는 그 일시 및 장소, 그밖의 필요한 사항을 검사받을 사람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이번 면허취소 통지도 처음엔 5년전의 전 주소로 배달됐다가 '수취인 미거주' 로 반송되고 재배달되는 복잡한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아 적성검사 통지서도 전 주소지로 배달됐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사 직후 차량등록도 옮겼고 동회에도 신고했으므로 새 주소지로 적성검사 통지를 해줘야 마땅했던 것이다.

창구 직원에게 항의했지만 적성검사 통지는 '서비스' 지 의무사항은 아니라면서 이의가 있으면 90일 이내에 행정심판을 청구하라는 답변 뿐이었다.

행정 민주화니, 현장행정이니 하지만 실제 일선 행정의 모습은 예나 이제나다.

이번 한.일간의 어업협정은 지난 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른 것이다.

즉 5년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준비만 잘 했으면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현장조사는 하지 않고 엉터리 조사자료를 토대로 협상에 임했기에 실수가 빚어진 것이다.

탁상행정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이래 놓고도 어민들의 항의엔 마치 제 돈인양 국민 세금인 예산으로 보상해 주겠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새 정부 1년간 '개혁' 이란 소리는 귀따갑게 들었어도 개혁을 전혀 실감 못하는 가장 큰 요인도 행정이 이렇듯 구태의연한 데 있다.

행정을 일대 쇄신하려면 우선 인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이 전문화의 시대에 공동정권이라며 나눠먹기식 혹은 나눠주기식 인사를 해서는 행정이 쇄신될 리 없다.

그 방면에 전문적인 식견이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국민을 위한 행정에 자신의 명예를 거는 야심적인 인사를 배치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행정 책임자가 일선 현장을 직접 꼼꼼히 챙겨야 한다.

'장관이 뭐 좀스럽게…' 하는 관료들의 말을 듣고 점잖을 뺐다가는 '왕따' 가 돼 탁상행정을 하기가 십상이다.

신임 건설교통부장관이나 서울시장이 부임 직후 버스나 지하철을 타보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다.

정치적 제스처라고 보아 넘기지만 그것을 생활화한다면 얻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 번 타고 마니까 제스처로 끝나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모두 일선 업무를 낱낱이 챙길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직접 챙기지는 않아도 일선 현장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무지.무능.무관심.무책임.무의욕 등등과 같은 행정의 무 (無) 행진은 정말 이젠 끝내야 한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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