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르바초프의 영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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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5년 3월 11일은 소련 역사상 중요한 날이었다.

노쇠한 콘스탄틴 체르넨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하고 후임으로 54세의 젊은 정치국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취임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과거의 소련 최고지도자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모스크바대에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지성과 행동력을 함께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할 무렵 소련은 내부로부터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2만4천여개 공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었으며, 최저생계비 80루블에도 못미치는 급료를 받는 근로자가 4천만명이나 됐다.

또 대외적으론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기능정지 상태에 빠진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와 글라스노스트 (개방) 를 도입했다.

대외 정책에선 서방 자본주의 사회가 타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구적 문제에 대해 함께 손잡고 해결을 모색하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이른바 신사고 (新思考) 외교를 추구했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이 동서냉전의 종식이다.

특히 동유럽 민주화와 독일 통일은 고르바초프란 인물이 없었더라면 실현 가능성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의 기적이었다.

국내적으로 고르바초프는 궁지에 몰렸다.

보수파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그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반복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개혁을 추진하면 할수록 자신의 권력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르바초프의 비극이었다.

밖에서는 세계적 지도자로 추앙받았지만 소련 국내에선 '배신자' 로 배척당한 고독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평가했다.

일찍이 고르바초프를 '80년대의 인물' 로 꼽았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해 고르바초프를 '20세기 위대한 지도자.혁명가 2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91년 12월 소련 해체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고르바초프는 잊혀져 갔다.

96년 러시아 대통령선거에선 전체 투표의 1% 지지도 얻지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경제적으로도 고난의 연속이다.

97년말 미국의 피자 체인점 피자헛 광고 모델로 나오더니, 이번엔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 10만달러의 출연료를 받고 막간 (幕間) 출연해 창피를 당했다.

지난해 여름 러시아 금융위기때 은행에 맡긴 예금을 날리는 바람에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한다.

20세기 세계사를 바꾼 영웅의 말년치곤 너무도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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