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한민국'의 출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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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0년 전 오늘 태화관에 모인 33인의 민족대표는 모두 종교단체를 통해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일제의 단속을 피해 은밀한 조직작업을 펼치기에는 종교활동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33인 중 개신교가 16인, 천도교가 15인, 불교가 2인이었다. 개신교와 천도교가 전국적 조직으로 참여한 반면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韓龍雲) 과 백용성 (白龍城) 이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이어진 만세운동에도 천도교와 개신교계에서는 전국에서 조직적 참여가 있었다.

천주교는일본 통치를 지지하던 교구장 뮈텔 주교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학시킬 정도로 강경한 탄압을 행했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이 개인자격으로 독립운동에 열렬히 호응했다. 유림 (儒林) 도 3월 1일 독립선언에는 빠졌지만 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서 뚜렷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유림 인사 중 독립운동과 관련, 주목되는 인물이 둘 있다. 김윤식 (金允植.1835~1922) 과 김창숙 (金昌淑.1879~1962) 이다.

구한말의 거물 정치가 김윤식은 파란만장한 경력 가운데 친일세력과 협조한 대목도 있지만 국체 수호에는 확실한 입장이었다. 합방을 적극 반대한 유일한 고관이었고 3.1운동 직전 고종이 죽었을 때도 '전 (前) 한국 황제' 란 위호 (位號)에서 '전' 자를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충성은 대한 '제국' 에 그치고, 대한 '민국' 에는 이르지 못했다.

반면 김창숙은 3.1운동에 호응해 '유림단' 운동을 일으키고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해방 후에도 민족분단을 막으려 애쓰고 이승만 (李承晩)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맞서는 등 시대상황이 필요로 하는 유학자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꾸준히 추구했다.

독립운동으로서 3.1운동의 큰 의미는 '제국' 의 부활에서 '민국' 의 건설로 목표를 옮긴 데 있다. 합방 직후의 울분이 억눌릴 대로 억눌린 뒤, 세계정세를 파악한 신지식인들이 민족국가의 건설방향을 새로 설정한 것이다. 이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다.

3.1운동이 지향한 민족국가는 해방 전은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실현되지 못했기에 그 이념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제2의 건국' 을 논함은 그 이념이 발전적 변화의 때를 맞았다는 것일까.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필요한 과제라는 생각도 들지만 숙제를 안한 채 개학을 맞는 학동처럼 불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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