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28.연재를 마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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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아직 나의 북한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개성과 백두산 답사기는 책의 일감으로 남겨두고 신문연재는 여기서 끝맺고자 한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해 1월 12일부터 시작한 제1부 28회, 지난해 8월 15일부터 시작한 제2부 28회, 총 56회로 1년이 조금 더 걸렸다.

연재하는 동안 나는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 했다.

1주일마다 신문 한 면을 채워야 하는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남북한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줄타기해야만 하는 나의 아슬아슬한 처지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실 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만약 계획대로 문화유산에 대해서만 글을 썼다면 나는 크게 고민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북한답사기를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분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양쪽 정부로부터 북한답사기를 쓸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고도 이를 통한 인간적 교감과 민족적 동질성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라면 애당초 북한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최대한 그들의 살 냄새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대담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의 든든한 연구원들이 항시 내 글을 비판적으로 열독한 뒤 조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무사히 여기까지 오게 됐다.

권영빈 (權寧彬) 소장 이하 연구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다.

신문의 글이란 독자 반응이 워낙 빨라 조그만 잘못이 있어도 금방 지적이 있고, 어쩌다 공감이 가는 글이 나오면 격려가 바로 있으며, 약간만 미심쩍어도 문의와 항의가 들어온다.

그 중 항의란 내가 혹시 북한에 우호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특히 나의 남한답사기에는 올곧은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것이 있는데 왜 북한답사기에는 그런 매운 겨자맛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의 일과 글에는 그때 그때의 목적과 사명이 있는 법입니다.

제가 북한답사기를 쓰는 것과 남한답사기를 쓰는 것이 똑같은 계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제가 불과 며칠을 다녀왔다고 북한의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겠습니까?" 사실 나는 그런 항의나 의심을 받을 만큼 북한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북한에 관한 글에는 거의 맹목적인 비판이 끼어들었는데 내 글엔 그런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북측에서 내게 불만, 아니라면 최소한 서운함이 있었을 것을 감지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북측에서 내게 얼마나 잘해주고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보여주며 또 그런 것을 써주길 원했겠는가.

평양산원.만경대 학생소년궁전.국제친선전람관.평양제일고등중학교.인민대학습당.송도원 청소년야영훈련장…. 그러나 북한이 자랑하고 있는 이런 대표적인 명소에 대해 나는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상원군 용곡리 들판의 고인돌에 올려놓은 옥수숫대를 말할지언정 그런 화려한 것들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나를 북측은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렇게 한 건 내 글과 시각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북한사회의 특수한 면이지 일상의 표정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만약 북한의 어느 문사가 남한을 답사하고, 산업시찰과 새마을관광을 하고 나서 그것을 기행문으로 썼을 경우 그것이 과연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을 소개하는 옳은 일일까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논문을 쓸 때 세상에는 참고는 할지언정 인용해서는 안되는 글이 많음을 알았다.

이런 원칙을 나의 북한답사에도 적용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답사할 때나 돌아와 글을 쓸 때나 가장 후회스러웠던 것은 내가 북한의 지난 50년 역사와 문화변동에 대해 너무도 아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미술과 문화유산에 관계되는 사항이야 조사하고 연구해 아는 게 있었지만 상식으로 필요한 북한 입문이 전혀 돼 있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천리마운동이 언제 무슨 목표로 일어난 운동으로 그 기간중에 이룩한 사회적 성취가 무엇이고 무엇이 문제였나를 책을 보지 않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 자신의 게으름 문제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북한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르쳐주거나, 말하거나,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 맹목적 반공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갔을 때 그들은 어찌됐든 남쪽에서 동포가 왔다고 환영의 뜻으로 '고향의 봄' 과 '아침이슬' 을 불러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화답할 북한 노래 하나 내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을 답사하는 동안 나는 이름을 잊은 세브란스병원의 한 의사를 내내 생각했다.

5년 전 나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호주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시드니에 갔다가 이 의사를 만났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연구차 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호주의 의료시스템을 연구하러 왔습니다. 호주는 다민족국가인데 세계에서 의료시스템이 제일 잘 돼 있습니다. 본래 진료란 환자의 문화적 습성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다르게 되게 마련인데 어떻게 복합적인 문화를 단일시스템으로 운영하는가를 연구하러 온 것이죠. 언젠가 우리가 통일이 될 때 그간 벌어진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요. "

우리 사회엔 이렇게 말없이 스스로 통일을 일상 속에서 준비하고 있는 분이 있음을 미덥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 배움에 게으른 것이 미웠다.

그리고 답사기를 쓰면서는 항시 8백80년 전 고려에 사절로 다녀간 송나라 서긍 (徐兢) 을 생각했다.

그는 불과 한달여 머물고 갔음에도 돌아가서는 그 견문을 '선화봉사 고려도경 (宣和奉使 高麗圖經)' 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는 고려 정부의 통제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만월대 궁궐에 대한 인상부터 어느 집 잔칫상 밥그릇 생김새 같은 것까지 얘기함으로써 훗날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책이 됐다.

고려청자를 비색 (翡色) 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의 증언이었다.

나는 나의 북한답사기가 최소한 '북한도경' 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그러나 내 책의 가치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북한의 주민도 만나보고 거리도 홀로 다녀보면서 보통사람 (everybody) 의 일상생활 (everyday life) 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글은 그런 작업의 예고편일 뿐인 것이다.

혹 내게 그런 기회가 오면 또 북한에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안간다고 잘라말할 것이다.

그 대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전문인으로서 중앙력사박물관 또는 김일성대학에 교환교수로 다녀오라면 내일이라도 떠나겠다.

그런 날이 오면 돌아와서 독자 여러분과 다시 진하게 만나고 싶다.

오랜 기간 함께 해주신 사랑의 지지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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