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이러고도 법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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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들어 사건 처리를 둘러싼 검찰의 자충수가 잇따르고 있다.

검찰은 원칙과 기준에 따라 법만 집행하면 되는 기관인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외풍에 흔들리는지 딱하고 안쓰러울 지경이다.

권위나 명예는 간데없고 걸핏하면 동네북 되기 일쑤니 국민들 사이에 검찰을 우습게 보고 법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국회 529호실 사태가 좋은 예다.

여당이 '국기를 뒤흔드는 사건' 이라고 흥분하자 검찰도 덩달아 대규모 수사반을 편성하고 대검 공안부가 지휘에 나서는 등 맞장구를 쳤다.

또 며칠 후에는 이를 강력사건으로 분류해 검사장인 대검 강력부장이 현장에 나가 지휘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당직자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무더기 출국금지는 단 한명도 조사해보지 못한 채 정치권이 요구하자 슬그머니 해제하고 말았다.

사건 직후 서슬 퍼렇던 기세가 불과 20여일만에 꼬리를 내리기 바빴으니 누가 검찰을 신뢰할 것인가.

출입문을 따고 들어간 국회의원과 정치사찰 의혹을 불러일으킨 안기부 직원중 국회의원만 출국금지시켰던 법 집행이 과연 형평에 맞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또 24일의 한나라당 마산 집회를 앞두고 검찰이 지역감정 조장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거듭 강조한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지역감정 조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는 행위다.

그렇다고 해서 처벌법규도 없고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 검찰이 맡겠다고 나서서야 되겠는가.

지역감정은 법으로 다스릴 문제가 아니다.

과거 정권들이 그렇게 골치를 썩이면서도 왜 법제화하지 못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역감정 문제를 단속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또 지역감정 조장 행위에 대한 단속.처벌법규가 없어 관련법 제정을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려진 일이다.

지역감정 조장이 범죄 이상의 나쁜 행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법규정 없이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 등 엉뚱한 죄명을 끌어다 처벌하겠다는 것은 난센스다.

형사법을 자의로 넓게 해석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국가보안법이 악법이라고 비난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처럼 고무줄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아닌가.

법 규정이 없는데도 검찰이 처벌을 공언하는 것은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야당 집회를 여당이 지역감정 유발과 연결시켜 강하게 비난한 직후였던 만큼 검찰의 이같은 움직임은 정치적으로도 오해받기 십상인 것이다.

더구나 국회의장 명의의 여야3당 총무 합의문이 법무장관을 통해 검찰총장에게 전달된 26일은 검찰로서는 치욕의 날이라 할 만하다.

비리혐의 국회의원 10명의 체포동의안을 국회가 처리하지 않을테니 검찰이 알아서 불구속기소로 마무리해달라는 요지였다.

검찰의 정치인 사정이 물건너가면서 빈껍데기만 남게 된 것이다.

정치인들의 오만이나 후안무치 (厚顔無恥) 도 어지간해야지 이 정도면 검찰의 존재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된 셈이나 다름없다.

검찰총장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수사과정에서의 표적사정이니 편파수사니 하는 시비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국회의원이라고 수억~수십억 뇌물사건이 이런 식으로 처리된다면 검찰이 앞으로 일반 공직자 비리는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서민들의 부정은 무슨 낯으로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대전 법조비리 사건도 검찰로서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이 수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대전 지역 법조비리를 대전지검이 수사토록 한 것이 실수였다.

수사 마무리 단계에서 수사책임자의 비리 관련설로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예상된 자업자득이다.

또 수사 전담부서인 대검 중앙수사부를 동원하지 않고 내부 비리조사가 주업무인 감찰부에 맡긴 것도 문제다.

이것은 검찰이 당초 사건을 구조적인 대형 비리사건이 아닌 집안식구간의 내부 마찰 정도로 본게 아닌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출발이 비뚤어진 사건의 수사 마무리가 잘 될리 없다.

법대로 하자니 여론이 무섭고 여론에 따르자니 범죄사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형국이다.

또 바른 말은 커녕 눈치를 살피느라 죄가 안돼도 과감하게 털어내지 못하고 형사처벌을 못하면 징계.사표 등의 희생양이라도 만들기로 한 모양이다.

이게 진정 법치 (法治) 이고 검찰이 할 일인지 물어보고 싶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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