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미국 청문회에서 배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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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제통화기금 (IMF) 경제청문회 문제가 새삼 정치쟁점이 되고 있다.

제1여당인 국민회의가 과거정권 비리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야당측은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하면서 불참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자민련도 단독청문회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어서 과연 청문회가 열릴 것인지 자못 의아스럽다.

그런 가운데 국민회의는 단독청문회를 강행해 25일께부터는 증인을 부른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청문회에 대한 각당의 입장이 이처럼 서로 다르고 그것이 정쟁의 불씨가 되는 주요 이유는 당리당략에 있다고 생각된다.

국민회의로서는 이왕이면 과거 정권의 비리와 실정 (失政) 을 드러내보이는 극적 효과와 파괴력을 극대화하고, 한나라당으로서는 그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을 것이다.

이런 내심 때문에 여측은 비리규명설을 퍼뜨리고 야측은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며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청문회는 좌초위기에 빠지고 말았지만 국민과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열려야 한다.

경제파탄과 국가부도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실패의 원인과 과정을 차분하게 복기 (復棋)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지난해 11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 (李會昌) 총재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경제개혁의 교훈을 얻기 위해 청문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지금이라도 여야 3당은 여야 총재회담의 정신을 살려 청문회 개최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청문회는 경제환란을 일으킨 정부실패의 책임과 원인을 규명하자는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 의회의 청문회는 특정 어젠더 (agenda) 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관례며 논리와 법리, 사실과 증빙자료를 근거로 신문하고 증언한다.

정략적인 고려와 쇼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유리하다 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없고 불리하다 해서 발을 빼지도 않는다.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미국 하원의 탄핵소추과정은 청문회 성격이 강한 행사였다.

진행과정을 보면 소수여당인 민주당과 다수야당인 공화당은 철저히 논리와 실증으로 맞섰고 패배가 불을 보듯 뻔한 데도 민주당은 차분히 표결에 참여했다.

우리 정당들도 이 점을 본받아야 한다.

경제청문회는 원칙적으로 정책과오를 추궁하는 '정책청문회' 가 돼야 한다.

경제환란은 원초적으로 국정문란행위에서 비롯됐지 국법문란이나 부정부패에 기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정책실패를 부채질한 정경유착형 비리요인이 그 이면에 숨어 있었다면 그것을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경제환란의 원죄가 시장경제 논리를 도외시한 관치경제와 관치금융에 있었다면 그것에 기생하는 정경유착도 또 하나의 원죄적 요인으로 간주돼 마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리문제를 전적으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정책실패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과거 비리를 조사하겠다면 그것이 청문회의 핵심적 목적이어선 곤란하나 부차적인 필요조건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권이 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이 92년말 대통령선거때 사용한 대선자금을 문제삼는다면 형평성 시비를 불러일으켜 큰 파문이 우려된다.

김영삼정부가 역사 바로세우기를 명분으로 5, 6공 청산을 추진하자 많은 국민들이 관심 밖의 일로 여겼듯이 6년여 전의 대선자금을 들추는 일에 국민들은 식상해 할지 모른다.

청문회정국이 시작되기도 전에 개최 자체가 불투명하게 된 데에는 야당의 장외투쟁과 정쟁지향성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야당은 청문회 불참이라는 강경방침을 철회하고 여야총재의 합의를 준수해야 공당으로서의 위상을 지킬 수 있다.

여야 동수 특위구성만 계속 고집하는 것은 청문회를 정쟁의 제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오해받기 쉽다는 것을 야당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529호실 사태로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데 청문회 딜레마가 이를 더욱 자극해 올 한 해를 또 정쟁으로 허송할 경우 그 후유증의 부담은 여와 야가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국정파탄이 일어나도 원인규명과 책임추궁 하나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은 대의정치의 포기요, 민의에 대한 배반이다.

이렇게 되면 여당도 야당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청문회가 파행으로 끝난다면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고 냉소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야는 더 이상 청문회를 정쟁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꽉 막혀 있는 청문회장의 문을 정치력으로 풀어 외환위기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김호진 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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