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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1000만 관객시대’ 씨 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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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러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 박 선생.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귀향한 대학생이 양복에다 고깔을 쓰고 농민들과 같이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를 부르고 춤추는 신.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우러난 영화이다.”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별건곤』·1926)

1926년 가을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에 대해 비평가는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하였다”고 선언할 만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농촌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영화를 본 이 땅의 민초들은 통곡하고 흐느끼며 현실의 고통을 달랬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든 최초의 조선 사람 나운규(1902~1937). 단성사주 박승필의 후원으로 세운 나운규 프로덕션이 해체되는 1929년까지 그는 이 땅에 무성영화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영화를 둘러싸고 당대의 논객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민족을 우선하는 이들은 민족의 저항을 영상에 옮긴 민족주의자로 호평했지만, 민중을 앞세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계 비평가들은 “동족의 피를 빠는 무식한 광견”으로 돌려세울 뿐이었다. 그러나 “노부인, 여염집 부녀, 기생 그리고 여학생들로 매일 만원”이었던 부인석의 절반 이상이 “성에 갓 눈뜬 여학생”들로 채워졌고, 그녀들도 “키스하는 장면, 그 순간에는 반드시 질식할 듯한 외마디 소리”(‘극장만담’·『별건곤』·1927)를 터뜨리곤 했던 그때. 서구 영화의 문화 전파력이 “학교의 수신(修身) 과정보다도, 목사의 설교보다도, 또한 어버이의 회초리보다도 감화력”이 컸던 그 시절. 민족의 고통과 비애를 영상으로 담아 꺼져 가는 민족혼의 불길을 되살렸던 그는 분명 시대에 충일한 삶을 산 선구적 영화인이었다.

1926년 6월 ‘아리랑’ 개봉 넉 달 전 만들어진 ‘필름 검열 부칙’에 따라 영상물 검열이 시작된 일제하. “과거의 조선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는 평을 들었던 ‘아리랑’의 영광을 다시 맛보여 준 ‘사랑을 찾아서’가 본래의 제목 ‘두만강을 건너서’를 잃어버린 이유도 검열 때문이었다.

1928년 그가 각본·연출·편집을 맡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사진 左)으로 열연하던 그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새삼 그립다. 그는 35세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 땅의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치 않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작가정신은 오늘 한류를 꽃피운 한국 영화 성공의 원인이자 전통으로 살아 숨쉰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