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고바야시,日기성전 놓고 숙명의 라이벌 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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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끈질긴 인연일까. 아니면 쇠심줄 같은 집념의 소산일까. 어렸을 때부터 평생 라이벌이었던 조치훈9단 (43) 과 고바야시 고이치 (小林光一.47) 9단이 40대 중반이 돼 일본 최대 타이틀인 기성 (棋聖) 위를 놓고 재격돌한다.

타이틀 보유자 조치훈, 도전자 고바야시. 86년 벌어졌던 바둑사에 길이 남을 휠체어대국 때의 바로 그 모습으로 두 사람은 기성 타이틀을 놓고 다시 만난 것이다.

도전 7번기 첫판은 13, 14일 양일간 프랑스 파리의 일본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우승상금은 3천3백만엔.

이들의 인연은 30여년 전 기타니 (木谷) 도장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바둑공부를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시절부터 도장의 유망주였던 두 사람은 강한 경쟁심리에다 기질마저 판이하게 달라 지금까지도 거의 대화가 없는 사이로 알려진다.

입문은 조치훈이 앞섰다. 프로입단은 고바야시가 1년 빨랐고 최초의 타이틀 획득은 조치훈이 2년 빨랐다.

바둑 외길의 두 사람이 도장에서 돌봐주던 연상의 여인들과 나란히 결혼한 것도 당시의 화제였다. 70년대의 일본 바둑은 린하이펑 (林海峰) 9단과 오타케 히데오 (大竹英雄) 9단, 그리고 기타니 3총사로 불린 이시다 요시오 (石田芳夫).가토 마사오 (加藤正夫).다케미야 마사키 (武宮正樹) 9단 등이 정상을 휩쓸고 있었다.

80년이 되자마자 趙9단이 오타케로부터 명인을 따내며 먼저 정상에 올랐다.

이듬해엔 다케미야로부터 본인방을 쟁취했고 83년엔 새로 생긴 최대 타이틀 기성마저 쟁취했다.

고바야시9단은 77년에 천원전, 84년에 10단전 등을 우승하며 끈질기게 외곽을 맴돌다가 85년에 趙9단을 4대3으로 꺾고 명인을 따내며 처음으로 3대 타이틀의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6년 조치훈의 기성위에 도전했는데 때마침 趙9단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게 된다.

趙9단은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휠체어에 앉아 대국을 강행하고 이로써 '목숨을 걸고 둔다' 는 그의 좌우명이 유명해졌다. 승부는 고바야시의 4대2 승리. 조치훈을 제치고 정상에 오른 고바야시는 이로부터 뒤늦게 재능을 꽃피우며 5관왕이 됐고 또 기성 8연패의 기록을 세우며 거의 10년간이나 일본 바둑계를 호령하게 된다.

무관으로 전락한 조치훈은 한때 술에 젖어 방황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곧 와신상담 속에서 재기를 위한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94년, 8전9기 끝에 고바야시를 4대2로 꺾고 기성위를 탈환했고 96년부터 98년까지 3년간 대삼관을 이룩하며 화려하게 제2의 전성기를 펼치고 있다.

무관으로 밀려버린 고바야시는 일류기사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였다. 하지만 친딸인 고바야시 이즈미 (小林泉美.22) 3단이 98년 여류기성이 되면서 고바야시는 심기일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지난해 말, 구도 노리오 (工藤紀夫) 9단을 3대2로 꺾고 천원을 따냈고 그 직전엔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 9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기성전 도전자가 됐다.

고바야시가 재기를 노리며 5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격렬하고 파괴적이어서 '폭파전문가' 라는 별명이 붙은 조치훈. 체면 불구하고 바닥을 긴다 하여 '지하철' 이란 별명이 붙은 고바야시. 평생의 싸움에서 趙9단은 대체로 고바야시보다 한발 앞서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상대전적은 고바야시 쪽이 57승53패로 오히려 앞서고 있다. 다만 趙9단은 7번승부에 관한한 27승3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보이고 있어 이번에도 趙9단 쪽이 우세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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