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공사 따게 도와주면 최소 한 장” 은밀한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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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K상무가 최근 기자에게 털어놓은 얘기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공공부문 턴키 공사를 따기 위해 건설업체들이 벌이는 로비의 한 단면이다. 최근 한 건설사가 파주신도시 커뮤니티센터 입찰 심사위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불법 로비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정부가 제도 보완에 나선 가운데 건설업계 일부에서는 턴키 공사 발주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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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로 얼룩진 입찰=지난해 국내에서 발주된 300억원 이상의 턴키 공사는 107건 12조3850억원이다. 전체 공공공사의 23%를 차지한다. 대형 건설사들이 요즘 턴키 공사 수주에 더 치중하는 것은 주택경기 침체로 일거리가 크게 줄어든 판에 몇몇 대형 업체끼리만 경쟁하는 턴키 공사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최저가낙찰제 공사는 건설사들이 제시한 응찰가의 60% 선에서 낙찰되는 반면 턴키 방식은 응찰가의 90% 선에서 낙찰가가 결정된다.

이 연구원 최민수 연구위원은 “일거리 가뭄에 공사 규모가 크다 보니 업체들이 목숨을 건 수주경쟁을 벌인다”며 “건설업체로서는 자사에 우호적인 심사위원을 확보하려고 로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건설업체들의 기술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턴키 입찰이 실력보다는 로비를 잘하는 업체가 사업자로 선정되는 모순을 낳는 것이다.

◆“내 편으로 만들어라”=턴키 공사를 따기 위해 업체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 심사위원 상시 ‘관리’다. 턴키 공사 설계심의는 전국 3000여 명의 전문가(교수·연구원·공무원) 집단에서 선정된 10~15명이 맡는다. 이들 위원은 심사 당일 새벽에 통보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공사를 심사할지 평소엔 알지 못한다. 따라서 건설업체는 예비 심사위원들을 상시 관리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 관리를 잘한 업체일수록 높은 점수를 얻는 데 유리하다. B건설 Y상무는 “교수들의 주량은 어떻고 골프 핸디캡은 얼마인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까지 파악돼 있다”고 전했다.

로비 대상은 학연을 기준으로 할당된다. C건설은 건축·토목과 출신의 임직원 250여 명을 통해 모교 건축·토목과 교수들을 집중 관리한다. 관계 형성을 위해 골프 접대와 금품 및 향응 제공 등도 뒤따른다. D건설 관계자는 “평소에 관계를 다져놓지 않고 입찰 때 접근해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중순 한 대형 건설사 쓰레기 분류장에서는 뭉텅이 상품권 상자가 발견되기도 했다. 턴키 공사를 담당하는 건축사업부의 한 직원은 “턴키 공사 수주를 위해 각계에 지급하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라고 말했다.

친한 사이가 되면 구체적인 얘기도 오간다. 건설사 직원은 평가위원 후보들에게 ‘공약’을 한다. 사례비에 관한 것이다. 1000억원 정도의 공사는 위원 1인당 5000만~1억원이 적정가라고 한다. E건설사 K부장은 “2000억원 규모 프로젝트에 대해 25억원가량을 사례비로 잡아놨다”고 털어놨다.

수주 성공하면 ‘연구용역비’ 명목 대가 지급

‘공약 이행’에는 여러 수단이 동원된다. 건설사가 교수에게 맡기는 연구·개발 프로젝트 용역이 주요 수단이다. 지난해 5대 메이저 건설사의 연구·개발비는 평균 1000억원 선으로, 이 중 상당 부분이 대학 교수들에게 의뢰한 용역비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F건설사 H상무는 “자녀를 유학시킨 교수에게는 건설사 해외 현장을 통해 달러로 직접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공사가 발주되면 심사위원 명단을 미리 빼내려 발주처를 대상으로 로비를 하기도 한다. G건설사 J상무는 “심의 3일 전에만 평가 위원 리스트를 알면 100% 수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비는 당일까지 이어진다. 김포 한강신도시에 아파트를 짓는 2000억원대 공사 입찰 심의가 있던 지난 14일 오전에는 심의장소인 경기도청 신관에 건설사 직원 80여 명이 모여 심의장으로 들어가는 교수를 상대로 ‘눈도장’을 찍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 직원은 “새벽 4시부터 C교수 집에서 기다리다 모셔왔다”고 말했다.

H건설 전직 임원은 “기술 개발 등 본업에 힘써야 할 인력이 몇 달 동안 심사위원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기 바쁜 게 우리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철현·함종선 기자

◆턴키(Turn-key) 공사=한 업체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공정을 맡는 공사로, 주로 300억원 이상의 큰 사업이 이 방식으로 발주된다. 업체가 제시한 설계·시공 방안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설계·낙찰가·시공능력 점수를 합산해 낙찰자를 정하지만 설계 평가 점수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주로 대형 건설업체들만 참여하다 보니 시공 능력은 거의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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