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워크아웃,3곳중 1곳 '적색경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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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6월 25일 국내 2백8개 금융기관이 자율협약 형식으로 만든 '기업구조조정협약' 을 모체로 워크아웃이 시행된 지 반년이 지났다.

말이 자율협약이지 연쇄부도와 실업사태에 쫓긴 정부가 금융기관들을 다그쳐 짜낸 고육책이었다.

그동안 6대 기업집단 이하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포함, 77개 기업이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돼 24일 현재 이 가운데 48개 업체에 대해 자금지원을 포함한 구체적 시행방안이 확정됐다.

이들 77개 기업에 금융기관들이 빌려준 돈은 모두 28조7천8백억원. 이미 워크아웃 계획이 확정된 기업에 출자전환과 신규 자금대출 등으로 4조원이 넘게 나간 추가 지원까지 합치면 워크아웃 작업에 내건 돈은 32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돈이 걸린 워크아웃은 과연 제대로 되고 있는가.

◇ 선정과정부터 문제 = 워크아웃은 정부 자체 평가에서조차 '적색경보' 가 울리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98년 정부업무 심사평가 보고회에서 국무총리 자문기구인 정책평가위원회는 워크아웃이 대상선정.추진체계 양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기관들의 워크아웃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 설치된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오호근 (吳浩根) 위원장은 "워크아웃 선정사례 중 3분의1은 불만스럽다" 면서 "이중에는 결국 부도나 법정관리 등의 형태로 깨질 곳들이 있다" 고 말했다.워크아웃 대상기업 셋중 하나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워크아웃의 이같은 위기는 본래 기능이 무시된 때문으로 지적된다.

워크아웃은 IMF체제 이후 어려움에 빠진 기업들 가운데 ^장래성이 있는 기업을 골라^대출금을 주식으로 바꿔주는 출자전환이나 상환기간 연장 (3~5년) , 이자경감 (우대금리 적용) 등을 통해 빚 부담을 덜어주되^치열한 자구노력을 유도해 기업을 되살린다는 것이 골자다.

성공하면 금융기관들은 제값을 되찾은 주식을 팔고 꿔준 돈을 회수할 수 있게 돼 기업.은행이 함께 사는 이른바 '윈윈' 전략으로 불린다.

그러나 막상 시행 과정에서 "장래의 가능성보다 그대로 두면 부도날 기업부터 살려주는 수단" (吳위원장) 으로 전락했다.

한 은행 워크아웃팀장은 "은행들이 당장 부도를 맞아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이 나빠지는 상황을 모면하는데 급급했던 게 사실" 이라고 말했다.

박홍진 (朴弘鎭)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동아건설.고합 등 지난해 말부터 협조융자로 연명해 온 기업들을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행계획이 확정된 48개사 중 적자누적으로 자본금을 까먹은 자본잠식 업체가 신원.삼표상사 등 3개사며, 부채비율이 1만%를 넘는 기업 (대경특수강.진도물산) 도 포함돼 있다.

정부 정책평가위원회도 이들 기업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했다.

선정기준이 투명하지 못하다 보니 특혜 시비와 외압설.유착설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빚이 많은 기업일수록 특정 지역이나 정치인.고위관료와의 관계가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한 시중은행장은 "내용이 좋지 않은 기업에 대해 지역연고가 있는 정치인은 물론 정부내 실력자까지 줄줄이 부탁 전화를 해와 큰 곤욕을 치렀다" 고 털어놓았다.

잡음이 끊이지 않자 기업구조조정위원회는 지난 11월 12일 기업구조조정협약 대상선정 기준을 대폭 강화한 세부준칙을 새로 마련,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는 '사후약방문' 격이었다.

77개 업체 중 화성산업 및 신우 3개사와 유일하게 대상선정에서 탈락한 통일그룹 4개사를 제외한 69개사가 이미 이날 이전에 선정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 이행과정도 부실 = 일단 워크아웃 대상으로 선정되면 회계법인 등 외부기관 실사를 거쳐 채권단에서 지원방안을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지원내용이 기업마다 들쭉날쭉하다는 것이다.

기업마다 사정이 제각각인 만큼 지원규모가 똑같을 수는 없지만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고합그룹 4개사에는 빚을 줄여준 것 외에도 3천억원대의 신규 자금이 지원됐으며, 이외에 5개 기업집단에 각각 1천억원 이상이 새로 지원됐다.

신규 자금지원과 출자전환을 합친 금융지원 규모를 해당 기업 부채 규모와 비교해 봐도 차이가 많다.

신원.신호그룹의 경우 전체 부채의 53%.44%에 해당하는 지원을 받아 빚 부담을 절반 가까이 줄이게 됐다.

이런 비율은 10~30%선에 불과한 다른 기업들과 비교가 안된다.

워크아웃에 들어가지 않고 자력갱생 (自力更生) 하고 있는 기업들과의 형평도 문제. 건축자재 생산업체인 D사의 영업담당 임원은 "우리는 어렵게 구조조정해가면서 꼬박꼬박 정상이자를 내고 있는데 워크아웃 대상이 된 경쟁기업은 빚 부담을 던 데다 이자까지 우대금리를 적용받아 얻게 된 여력으로 덤핑에 나서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고 불평했다.

기업의 자구노력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흔적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특히 최근들어 주가가 오르면서 형편이 나아진 기업들의 '버티기' 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K그룹에 파견된 은행관리단 관계자는 "워크아웃 이행계획상 연말까지 정리키로 한 계열사를 이제와 경영진들이 못팔겠다고 버티는 통에 애를 먹고 있다" 고 말했다.

이밖에 채권단 내부에서도 이해가 엇갈려 지원 합의를 해놓고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등 워크아웃은 도처에서 삐걱거리고 있

기획취재팀 손병수.홍승일.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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