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제2부18.조선미술박물관의 명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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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어느 나라를 가든 나의 여행은 곧바로 박물관 관람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나의 본업이고 본색이다.

하물며 평양에 와서 그렇게 보고 싶었지만 사진으로만 접해왔던 우리의 유물들을 보지 않고 무엇을 보겠는가.

평양에는 3개의 큰 박물관이 있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조선미술박물관.조선민속박물관. 그중 나의 관심은 당연히 미술박물관에 있었다.

거기는 이른바 아트 뮤지엄으로 우리가 예술의 진수로 손꼽고 있는 회화.조각.공예의 명품들이 전시돼 있는 것이다.

나의 전공은 한국미술사,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회화사이며 특히 조선후기의 화론 (畵論) 과 그림에 관해 논문을 발표해 오고 있다.

때문에 나의 관심은 또한 여기에 집중돼 있다.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당연히 은사이기도 한 국립중앙박물관 정양모 (鄭良謨) 관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고, 그 자리에서는 자연히 평양에 가면 주의깊게 볼만한 회화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평양의 박물관엔 조선시대 회화가 제법 있다지?" "그러나 명품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만약 관장님께서 소장처에 대한 고려없이 조선시대 명화선집을 편찬하신다고 하면 3백점을 뽑아야 5점 정도 고르실 걸요. " "무얼 꼽을 수 있나?"

"이암 (李巖) 의 '고양이와 강아지' , 김두량 (金斗樑) 의 '소몰이꾼' , 이인상 (李麟祥) 의 '나무밑에서 (松下獨坐)' , 김홍도 (金弘道) 의 '구룡폭' , 김득신 (金得臣) 의 '양반과 상민' 정도겠죠. " "자네는 그렇게 잘 꼽으면서도 적다고 말하나?" 순간 나는 경솔했던 나의 말을 후회했다.

북한은 여러 조건상 동산 (動産) 문화재를 보유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해방 당시 모든 주요 문화재들은 남한에 있었고, 평양부립미술관의 2천5백점 유물 중에는 조선시대 회화가 거의 없었다.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 명화들은 모두 일본의 개인이 갖고 있던 것을 구입해 보완한 박물관 신수품들인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명화 5점을 확보한 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세상엔 명화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림 하나를 만난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5점을 꼽고도 적다고 한 것은 나의 단순한 남북 유물비교였던 것이다.

鄭관장님은 이어 한 말씀을 더 하셨다.

"이번에 가거든 그 김두량의 '소몰이꾼' 을 잘 보고 와서 얘기 좀 해 주게나. 무슨 얘긴지 알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

김두량의 '소몰이꾼' 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화다.

목동이 소를 나무등걸에 느슨하게 매놓고 풀밭에서 배꼽까지 드러내놓은 채 늘어지게 낮잠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곁눈으로 옆을 응시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의 크고 맑은 눈망울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소몰이꾼의 표정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골의 서정과 세태의 풍자가 동시에 느껴진다.

이런 그림은 본래 전통적으로 '전가낙사 (田家樂事)' 라고 해서 전원생활의 한가로운 즐거움을 표현하는 소재로 그려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김두량은 이 서정적인 소재를 대단히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우선 소의 모습을 보면 여지없는 조선의 소로 종래의 화가들이 그리던 남양의 물소와는 판연히 다른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그리고 목동의 얼굴과 잠자는 포즈에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낮잠이 아니라 노동으로 지친 머슴의 피곤이 오히려 느껴질 정도로 땀냄새조차 풍긴다.

그러니까 김두량은 전원의 한가한 풍경화를 박진감 넘치는 속화 (俗畵) 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후기 속화의 탄생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경로였다.

이 작품은 일찍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제14권 (1934년)에 소개돼 널리 알려져 왔는데, 이 책에 의하면 구한말의 궁실 내시로 대수장가이고 감식안이었던 송은 (松隱) 이병직 (李秉直) 소장품으로 돼 있다.

그러다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1980년대에 간행된 북한의 유물도록에 이 작품이 실려 있어 비로소 일본을 거쳐 북한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런데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사진에 보면 왼쪽 아래에 '김덕하 (金德夏)' 라고 서툰 글씨로 쓰여 있던 관기 (款記)가 지워져 있고, 소 뒷다리 부분에 있던 상처도 수리돼 있다.

鄭관장님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신 것이다.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대했을 때 나는 우선 사진보다 실작품이 더욱 생동감 넘치는 명화라는 느낌을 받고 너무도 반가웠다.

말 없이 한참 그림의 묘미를 감상한 다음 자세히 살피니 그림의 수리부분은 일본에서 복원한 솜씨였다.

그리고 '김덕하' 부분은 깜쪽같이 - 역시 일본에서 - 지웠고 오른쪽 나무뿌리 아래에는 '송은진장 (松隱珍藏)' 이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이 '소몰이꾼' 작품엔 낙관이 없고 표암 강세황의 화평 (畵評) 이 있어 그 시대 그림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김두량이라는 근거는 없고 옛날에 있던 '김덕하' 라는 글씨 또한 믿을 것이 못된다.

김덕하는 김두량의 아들로 역시 화원이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좁고 긴 횡축의 '사계산수' , 정확히는 '봄.여름의 도리원 (桃李園) 풍경도' 와 '가을.겨울의 사냥그림' 두 축은 1744년 김두량.김덕하 부자의 합작이었다.

다만 이병직의 안목을 믿기 때문에 김두량으로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싱거운 소견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몇 안 되는 명품 중에 김득신의 '양반과 상민' 이라는 그림이 소장돼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세태를 반영한 속화 중에서도 가장 계급적 갈등을 리얼하게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관에 가장 잘 들어맞는 그림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는 헛소리를 내던지게 하는 것이다.

김득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원 김홍도의 충실한 후계자로 단원의 속화는

배경없이 인물의 몸동작을 드러내는데 역점을 둔 반면 김득신은 반추상에 가까운 은은한 배경처리로 회화적 효과를 높였다는 평을 받고 있는 화가다.

이 '양반과 상민' 은 그런 명성에 값하고도 남음이 있는 명화였다.

그리고 김득신 이후 우리의 속화는 퇴락의 길을 면치 못해 이 작품이 그 찬란하던 조선시대 속화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났던 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김득신의 '양반과 상민' 을 보고 있자니 왠지 영광의 뒤안에 서린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자꾸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잠시 먼 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조선미술박물관의 복제화들'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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