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그들의 죄목은 단 하나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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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332쪽, 1만2900원

답답하다 그리고 먹먹하다. 우리 현대사에 철저히 묻혀 있던 ‘시베리아삭풍회’ 이야기를 조명한 이 책을 보고서다. 이 모임은 8·15 광복 후 구 소련의 시베리아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이들이 만든 것. 시베리아 강제노동? 아오지 탄광은 몰라도 우리 동포가, 그 혹한의 땅에서 그리 고초를 겪은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아무 잘못 없이. 아니, 잘못은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탓에 일제의 총알받이로 끌려간 게 죄라면 죄겠다. 거기다 제 나라 국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못난 정부를 둔 탓도 컸다.

1945년 8월 만주로 진군한 소련은 일본 관동군 60여 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중엔 강제로 끌려와 총을 잡아 보지도 못한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일본은 이들을 버렸다. 대소 배상방안의 하나로 포로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른바 기민기병(棄民棄兵) 정책이다. 이 통에 일본 군인으로 간주된 조선청년들도 속절없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3, 4년이 지나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1948년 12월 말 일이다. 약 2200명이 흥남항을 통해 귀환했다. 이 중 남한에 고향을 둔 500여 명은 49년 38선을 넘어왔다. 기구한 운명의 2막이 오른 것이다. 남북한이 대치하던 중이었던 만큼 이들은 경계병의 총부리 앞에 서야 했고 그 뒤에도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을 받아야 했다. 누구 한 사람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지 않았다.

겨우 고향에 돌아간 이들은 다시 시련을 겪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때로는 인민군으로, 국군으로 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통에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으니 이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엄두도 못냈다. 1990년 한-소 수교 이후에야 민간차원에서 러시아에 밀린 임금 지불 등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에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고 여의치 않자 재판을 청구했다. 하지만 어느 정부에서나 돌아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 궤변에 가까운 책임 회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자국민에겐 보상한 일본정부는 이들 한국인 억류귀환자는 일본인이 아니므로, 또 보상 시한이 지났으므로,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일괄 타결 되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거부했다.

80줄에 들어 하나 둘 세상을 떠나 이제는 채 30명도 안 되는 삭풍회 회원들은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민초들은 누가 챙길 것인가. 생생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르포문학’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 책을 보고 드는 의문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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