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유씨 석방, 남북관계 개선 훈풍의 씨앗 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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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북한에 억류돼 있던 현대아산 근로자 유씨가 억류 136일 만인 어제 풀려났다. 이로써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던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제거됐다. 유씨의 무사귀환을 환영하며, 그의 석방이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이는 훈풍의 불씨가 되기를 기대한다.

개성공단에서 숙소 관리 업무를 하던 유씨는 3월 30일 공단 현지에서 체제 비판과 여종업원에 대한 탈북 책동을 했다는 이유로 북측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된 뒤 장기 억류돼 왔다. 북한의 개성공단 감독기구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남측에 보낸 통지문에서 유씨에 대해 “현대아산 직원의 모자를 쓰고 들어와 우리를 반대하는 불순한 적대행위를 일삼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이후 세 차례 열린 개성공단 실무회담에서 남측은 유씨의 상태와 소재지 등을 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북측은 이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회피해 왔다.

피조사자에게 접견권과 변호인 참관 등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은 것은 남북 합의서와 국제 관례를 무시한, 부당한 비인도적 처사임이 분명하다. 뒤늦게나마 북한이 유씨를 석방한 것은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은 물론이고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근로자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성공단의 정상적 운영은 불가능하다. 향후 유씨와 같은 억류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측에 빌미를 제공할 만한 행동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의 하나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남북 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처리한다는 남북 당국 간 합의가 긴요하다.

유씨는 자유의 몸이 됐지만 아직 북한에는 4명의 우리 선원들이 남아 있다. 지난달 말 동해에서 조업 중 실수로 북방한계선(NLL)을 넘었다가 북측에 나포된 ‘800연안호’ 선원들이다. 이들에게 특별한 의도가 없었던 게 분명한 만큼 이들도 조속히 석방해야 한다.

미 여기자 2명은 풀어주면서 동족인 유씨를 석방하지 않는 것은 ‘우리 민족끼리’를 외쳐온 북한으로서도 부담이었겠지만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의 방북에 맞춰 북측이 유씨를 풀어준 데는 경색된 남북관계가 북측으로서도 유리할 게 없다는 현실적 고려가 작용했다고 본다. 남측을 따돌리고 미국만 상대한다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은 통해서도 안 되지만, 통할 수도 없다. 결국 북한이 기댈 곳은 남한밖에 없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여기자 석방으로 북·미 간에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는 만큼 우리로서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정부가 북측에 전향적인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박왕자씨 피살 사건이 매듭지어지는 것을 전제로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 이산가족 상봉,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의 재개 등과 관련한 과감한 제안을 8·15 기념사를 통해 밝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궁극적으로는 북핵 문제의 해결에 달려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노력대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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