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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기 왕위전 도전기 2국' 매복에 걸려든 이세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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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38기 왕위전 도전기 2국
[제2보 (23~36)]
黑.이세돌 9단 白.이창호 9단

서두르지 않는 이창호. 사막을 흐르는 강처럼, 수도승처럼 외롭게 먼 길을 가는 이창호. 그런 이미지의 이창호9단이 초반에 정석에도 없는 강수(백△)를 터뜨리며 흑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 의외의 강공에 이세돌9단은 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검토실에선 정석을 벗어난 이 한 수가 '축'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바둑에 입문하면 처음 배우는 게 축인데 천하고수의 대결에서 웬 축 타령일까.

'참고도'를 보자. 백△의 강수는 보통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 흑1, 3으로 젖혀 이으면 한 수 차이로 귀가 먼저 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백4로 젖히는 비상수단이 있다. 이후 필연의 수순을 거쳐 13의 축몰이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멀리 좌하귀 백□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축 치고는 어려운 축이다. 그렇더라도 이세돌9단 같은 당대의 고수가 축을 깜박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천재 이세돌의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직감과 통찰력에 의존하는 이세돌은 아주 가끔 눈앞의 전봇대를 보지 못한다. 돌이켜 생각할 때 이창호의 치밀함에 새삼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전보에서 이창호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A의 날일자 대신 백□를 둔 것은 우상 전투에 대비한 것이었다. 전투적인 이세돌이 가장 전투적인 정석을 쓸 수 없도록 미리 축머리를 배치해둔 것이었는데 용맹한 상대는 별 생각 없이 백의 매복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이었다.

이세돌은 23이란 유일한 해결책을 찾아내 근근이 우상을 수습했다. 그러나 36까지 바둑은 때 이른 흑의 고전이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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