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외국 도시들 <상> 도심 뒷골목 갱단 소굴을 시민공원으로 바꾼 힘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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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들이 차지했던 뒷골목에서 주민들의 공간으로 변신한 피닉스의 키즈 스트리트 파크. [피닉스시 제공]

65억 세계 인구 중 도시 거주자 비율은 2007년 50%를 넘어섰다. 도시학자들은 미래 인류를 ‘호모 어버너스(homo-urbanus·도시인)’로 정의했다. 서울시의 경우 한강 르네상스, 공공디자인, 장기전세주택, 다산콜 120 등 도시 개조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미래 도시를 준비 중이다. 이와 관련,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선 칙센미하이 미국 클레어몬트대 교수 등 국내외 석학이 참여한 가운데 ‘창의시정 국제 콘퍼런스’가 열려 도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 시민 참여와 리더십으로 거듭난 외국 도시를 통해 글로벌 시티로 도약하는 방안을 짚어본다.

# 미국 피닉스=지난달 15일 오후 5시.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도심 서쪽 ‘키즈 스트리트(kid’s street)’ 공원에선 주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잔디 밭에 농구장·하키장으로 단장된 공원은 9년 전만 해도 뒷골목 우범지대였다. 조직폭력배와 성매매 여성들 때문에 해가 지면 주민도 외출을 꺼렸다고 한다.

변신은 한 시민에게서 시작됐다. 도너 니일(62·여)은 도심 서쪽에 변변한 공원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 주민들과 이 일대를 바꿀 계획을 세우고 시에 건의했다. 대학생 켈튼(22)은 “손가락질받던 동네가 주목받는 동네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키즈 스트리트 공원처럼 주민이 지역을 바꾼 것은 피닉스에서 흔한 일이다. 현재 피닉스에는 650여 개의 크고 작은 시민단체(citizen group)가 활동 중이다. 이들은 시 정부가 하는 일을 반대하기 위한 단체가 아니다. 대신 지역의 문제점과 해법을 시 정부에 제시하는 일을 한다. 시 정부는 각 단체의 제안이 시정 방향과 일치하면 예산을 지원한다. 마이클 셸튼 피닉스시 경제 매니저는 “우리에게 시민단체는 반대만 하는 비정부단체(NGO)가 아니라 지역을 함께 가꾸는 이웃공동체(neighborhood)”라고 설명했다.

주민 700여 명이 결성한 한 단체가 바이오 연구단지와 의과대학 유치에 앞장서자 시는 11만㎡의 부지에 건물을 지어 지원했다.

박물관에 생산 기능을 새롭게 접목한 네덜란드 틸뷔르흐의 섬유박물관 전경. [틸뷔르흐시 제공]


주민 제안이 시정에 반영되는 데는 피닉스 시 정부의 독특한 시스템이 한몫한다. 피닉스는 1913년 미국 최초로 ‘의회-시티 매니저 체제’를 도입했다. 시티 매니저는 시장과 의회가 공동 선임한 행정 전문가다. 선출직 시장과 의원 8명으로 구성된 의회를 통과한 정책은 시티 매니저에게 일임된다.

프랭크 페어뱅크스(62) 시티 매니저는 “정치적 목적의 시민단체와는 도시의 실질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며 “기업·대학이 들어오고 거리와 공원이 바뀌는 변화는 구호가 아니라 ‘내 동네를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고민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도시 혁신에 성공하면서 피닉스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다. 70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20년 새 두 배(156만 명)로 늘었다.

# 네덜란드 틸뷔르흐=지난달 22일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110㎞쯤 떨어진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 틸뷔르흐. 이 도시에는 일반 박물관과는 다른 섬유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에선 직물·니트·카펫과 의류 등 수출용 제품을 생산한다. 디자이너들이 상주하며 신상품도 기획한다. 박물관의 프랭크 튜어링스(44) 매니저는 “박물관은 과거의 공간이 아닌 현재의 소비자, 미래의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섬유박물관의 변신은 1998년 박물관 매니저인 카린 레인더르스의 아이디어를 시정부가 받아들인 결과다. 이는 ‘틸뷔르흐 모델’로 불리는 시의 경영 시스템과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시민이나 단체의 자발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접목하며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이다.

20년 전만 해도 틸뷔르흐는 몰락해 가는 도시 중 하나였다. 60, 70년대 튤립 가공·섬유 산업 등으로 호황을 누리다 80년대부터 이들 산업이 쇠퇴하면서 만성 재정적자를 겪었다. 이에 80년대 말 ‘틸뷔르흐 모델’이 시에서 착안됐다. 개인 또는 기관이 아이디어를 내면 해당 분야의 시 공무원(센트럴 매니저팀)은 사업 적격성을 검토한다. 이 내용은 시장과 7명의 시의원 회의에서 1차 논의를 거친 뒤, 시의회에 보고돼 최종 결정된다.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 곳에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한 결과 틸뷔르흐는 재정적으로 건실해졌다. 시는 절감된 예산을 미술관·콘서트홀 등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곳에 재투자한다. 루드 브리만 틸뷔르흐 시장은 “도시가 창조적으로 변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를 맡김으로써 도시가 발전하고 시민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며 “틸뷔르흐는 각 주체들의 아이디어가 모여 새로운 일자리를 끊임없이 창출하는 새로운 도시”라고 말했다.

피닉스=박태희 기자, 틸뷔르흐=김경진 기자

◆호모 어버너스(Homo Urbanus)=2005년 미국학자 셰퍼드와 시브코가 공저한 『글로벌 도시 확장의 역동성』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말. 도시형 인간이라는 의미. 이 책에 따르면 1800년만 해도 세계 인구의 3%만이 도시에 살았다. 2007년엔 처음으로 세계의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초과했다. 현재의 증가 추세대로라면 2030년엔 인류의 72%가 도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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