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걸림돌서, 지구 최고의 스타 정치인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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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호 04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140일간 북한에 억류돼 있던 미국인 여기자 유나 리와 로라 링을 구출해 냈다. [평양 조선중앙 통신=연합뉴스]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밥호프공항에서 펼쳐진 가족 상봉 장면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지구상 가장 억압적이고 폐쇄된 나라 북한에 억류돼 있던 두 명의 여기자들은 140일 만에 가족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하지만 이 드라마엔 두 명의 주인공 여기자들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 말없이 무대 뒤로 사라진 빌 클린턴(62)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CNN은 트랩에서 내려오는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고 묘사했다.

‘평양 드라마’로 부활한 빌 클린턴

인터넷에서 ‘12㎝짜리 키높이 구두를 신는 곱슬머리의 위험한 독재자’로 묘사되는 지도자의 ‘이상한 나라’. 국민은 굶어 죽어가지만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는 고급 프랑스 와인과 쿠바산 시가를 즐기는 나라. 미국 언론은 “그런 곳에 갇혀 있던 여기자들은 백마, 아니 흰색 비행기를 타고 온 전직 대통령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썼다.“대기실 문을 열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서 있었다. 너무 놀랐다. 다음 순간 악몽이 끝난 걸 알았다.” 여기자 로라 링은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감격을 이렇게 회상했다. CNN은 그녀에게 클린턴은 ‘메시아’와 다를 바 없었다고 했다.

세계에 폭넓은 인맥 자랑
클린턴의 평양 체류는 단 20시간. 하지만 김정일에겐 충분했다. 그만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무게가 다르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차관보는 클린턴을 ‘지구 최고의 프로필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그의 한반도 인연이나 지명도를 고려할 때 빌 클린턴은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확실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은 북·미 긴장이 고조되던 1994년 전임 대통령 지미 카터를 북한에 보내 핵개발 동결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또 8년간(1993~2001년)의 대통령직을 마치고 퇴임하던 당시 66%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할 만큼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다. 같은 전임 대통령이지만 지미 카터와 클린턴은 다르다. 카터는 거듭된 실정으로 연임에 실패하고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했지만 클린턴은 여전히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10대 대통령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국정 운영은 국내외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두 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닉슨 게이트를 이끌어낸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는 빌 클린턴의 특징을 개인적인 카리스마, 대중의 기호에 맞는 캠페인, 간결한 대화로 요약했다. 92년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라는 캠페인 문구로 현직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꺾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에서 크고,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를 거침없이 먹는 아칸소 출신의 ‘촌뜨기’ 정치인 클린턴은 색스폰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매력도 발휘해 한때 ‘M TV 대통령’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퇴임 후엔 1회 강연에 10만~30만 달러를 받는 스타 강연자이기도 하다.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벌어들인 강연수입이 3000만 달러다.

또 전 세계 정·재계에 걸쳐 폭넓은 인맥도 자랑한다. 이번 방북 이벤트에서 다우케미컬의 CEO 앤드루 리버리스와 부동산 재벌이자 할리우드 영화 프로듀서인 스티브 빙은 특별기와 수행팀을 제공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 가수 보노, 남아프리카공화국 만델라 전 대통령도 그의 절친한 친구다.

그럼에도 오바마 정부에서 그의 위치는 미미했다.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아내, 힐러리 클린턴을 돕는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를 과도하게 인신공격해 이미지를 망쳐 버렸다. 한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흑인 인권 신장에 기여했던 그였지만 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긴 발언을 해 비난도 받았다. 힐러리의 국무장관 취임 후엔 ‘남편의 폭넓은 인맥이 아내에게 걸림돌로 작용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빌 클린턴의 역할은 환경운동이나 에이즈 대책 같은 클린턴 재단의 활동 내로 위축되는 듯했다.

“이번 일로 영웅 이미지 생겨”
하지만 평양 방문으로 그는 다시 세계 뉴스의 중심 인물이 됐다. 빌 클린턴이 바라던 바였다.시카고 트리뷴은 빌 클린턴 지인들의 말을 인용해 “이번 방문은 이 전직 대통령(클린턴)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새로운 공적 역할을 맡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했다. 클린턴 정부의 고위 관리 출신의 한 인사는 “클린턴은 원하던 그 역할을 해냈다.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 정치인이자,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오바마와 김정일의 물밑 협상에 따라 ‘각본대로’ 움직였을 뿐이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TV 화면은 달랐을 것이다. 그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현란한 말솜씨, 부드러운 미소로 유명한 그가 이번엔 유례없는 침묵을 지켰다. 그 극적 반전 때문에 찬사는 더 커졌다. 평양 체류 20시간 동안 한번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고, 절제된 태도로 방북에 담긴 의미와 한계를 연출했다.

여기자들이 LA 공항에 내려 감격 속에 재회하는 5분여 동안 기내에 기다렸다가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뒤 모습을 나타냈다. 세련된 겸손으로 극적 효과를 얻어내는 연출의 미학이었다. 두 기자를 대동하듯 언론에 함께 나타났다면 반대파의 ‘정치 쇼’란 공격에 직면했을 수도 있었다. 6일 뉴욕시 클린턴재단의 에이즈 캠페인과 관련된 기자회견장에서도 “나는 더 이상 정책결정자가 아니다”며 “미국에 대통령은 한 명”이라며 몸을 낮췄다.

방북 이벤트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넓어졌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로스 베이커는 “이번 일은 그에게 일종의 영웅 이미지를 가져다 줬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각종 현안의 해결사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3명 구출에 클린턴이 다시 나서야 한다”는 진지한 주장도 있고 “이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반정부 시위 진압에 간여하면 해결된다”는 우스개도 있다.

“클린턴이 중국 쓰촨에 와서 방진 설계된 학교 건물 건설을 약속하면 중국 정부가 학교 건물 붕괴 책임자를 문책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클린턴이 월마트 대변인이 되면 월마트는 더 책임 있고 지속가능한 정책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클린턴이 나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농담이다.

억류된 자국인을 구출해낸 미국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큰 짐을 덜었고, 김정일은 체면을 구기지 않고 기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원하던 북·미 대화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경제난과 정쟁에 지쳐 있던 미국인들에게 이번 사건은 통쾌한 드라마다.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연출하고 빌 클린턴과 김정일이 주연한 드라마는 속편을 기다리고 있다. 빌 클린턴은 속편에서도 주요 역할을 기대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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