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못내리는 탈북 귀순자들]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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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북한인들이 남한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있다.

직장도 못 찾아 길거리 노숙자로 전전하는가 하면 범죄의 유혹에도 쉽게 말려든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속에 남한사회 '이방인' 으로 전락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현황과 정부정책 등을 점검해 본다.

"남한에 온지 이제 만 1년. 한국에 오면 모든 꿈이 저절로 이뤄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지만 나는 아직 직업도 없는 실업자 신세.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지…. " 북한을 탈출한 뒤 6년여동안 중국을 떠돌다 지난해 남한에 귀순한 김일봉 (가명.31) 씨. 그는 남한생활 만 1년이 되는 날의 일기장에 이같이 기록했다.

남한에 도착하기 전 희망에 부풀었던 그는 이제 지쳐있다.

직업을 찾을 수 없어 생계마저 걱정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金씨는 정착 초기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고 믿었다.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얻은 첫 월급 40만원을 음성 꽃동네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나섰던 지난해 8월. 63빌딩 보일러실에서라도 일하기 위해 모두 20여번을 찾아갔으나 회사측은 뚜렷한 이유없이 면담 요구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金씨는 중국에서 발행한 기술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경력도 인정받을 수 없는 현실이 억울하기만 하다.

주유소와 자동차 정비업소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사무실에 찾아와 죽치고 앉아 있는 '눈치 없는 경찰' 덕분에 그만두고 말았다.

金씨는 "정말 살아보려 목숨걸고 이 땅에 왔지만 진정 따뜻이 맞이해 주는 곳이 없다" 고 말하고 있다.

金씨는 막막한 생계, 그리고 남한사회에서 점차 깊어져 가는 소외감을 없애기 위해 한 교회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북한포교를 위해 종교단체의 훈련에 참여.활동하는 조건으로 그쪽에서 매달 60만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金씨처럼 교회 등의 도움만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탈북자들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올해 9월까지의 탈북 귀순자 수는 9백23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사망과 이민자를 제외하면 7백24명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다.

통일부 지원2과의 배대원 (裴戴源) 과장은 "전체 탈북 귀순자의 50%만이 생업을 가지고 있으며 30%는 무직으로 수입이 없어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 말했다.

황장엽씨와 김현희씨, 그리고 TV출연과 음식점 경영을 통해 성공한 극히 일부분의 귀순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생계곤란에 허덕인다.

귀순자들은 이 때문에 정착하면서 받게 되는 영구임대아파트를 불법인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준다.

아파트 월 관리비 20만원을 꼬박 낼 능력이 없는데다 '먹고 살' 돈이 없어 세를 내준 뒤 자신은 교회 등에 찾아가 기숙하면서 밥을 얻어먹기도 한다.

공사판 막노동자, 북제주 조기잡이 어선의 어부, 재단사 보조, 철도차량 정비원 등을 두루 전전한 탈북자 K씨 (29)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마셔댄 술로 이제 알콜 중독자가 됐다.

지난 9월에는 서울역의 노숙자로 배회하다 폭행사건에 연루돼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통일부 통계로는 귀순자 가운데 세상을 비관해 목숨을 끊은 경우도 5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에겐 남한의 벽이 사선 (死線) 을 넘은 용기로도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차고 단단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북한난민' 에 관한 우리 정부의 장기적인 시각 (視角)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도구' 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정보가치에 따라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고…. " (94년 탈북자 K씨) 자신들은 북한정보를 지닌 '상품' 이지 자유를 찾아 이주한 '동포' 가 아니라는 얘기다.

귀순자들은 자신이 지니고 온 북한정보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북한에서 행세하던 '거물급' 귀순자의 경우 안기부에서 별도로 관리하며 정착과정에서도 상당한 혜택을 받는다.

황장엽씨가 보로금만으로 2억5천만원을 받은 게 대표적 예다.

그러나 '별 볼 일 없는' 귀순자들의 경우 영구임대아파트를 얻는 주거지원금 8백50만원과 정착금 6백50만원만이 전부다.

탈북자들은 여기에다 자신들의 독특한 신분 때문에 기관원들의 각종 전횡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실제 안기부에서 탈북 귀순자의 신문.조사를 담당했던 부이사관급 S씨는 이들에 대한 금품수수가 인정돼 지난 7월 면직됐다.

어떤 신문관의 경우 탈북자들로부터 돈을 꾼 뒤 갚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원망을 듣고 있다.

이밖에 일부 탈북자들의 경우 반공강연회.지역유지의 격려금 등을 기관원들에게 뜯겼다고 하소연하고 있기도 하다.

"이북으로 돌려 보내겠다" "여긴 뭐하러 왔어" "가족을 버리고 온 인간 쓰레기" …. 조사.신문, 수용교육 과정 등에서 탈북자들은 담당관으로부터 이러한 폭언을 듣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귀순자는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는 날 마중나온 기관원이 '왜 와서 시끄럽게 구는가' 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영원히 못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여길 왜 왔을까' 하는 회의감 때문에 정말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습니다. " (95년 탈북자 L씨)

또 대북 (對北) 심리전을 위해 마구잡이로 노출되기도 한다.

"산업시찰에 나선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북한에 삐라로 날려 보냅니다. 정치적 선전 차원인 줄은 알지만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 (95년 탈북자 L씨)

자유를 찾아 사선 (死線) 을 넘어 한국에 왔지만 이들은 자신이 '이방인' '2등 국민' 이라는 의식을 아직 떨쳐버릴 수 없다.

기획취재팀 = 김교준.유광종.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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